오피니언 취재일기

한국 못 올뻔한 중국 거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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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견 언론인들로 구성된 관훈클럽이 창립 50주년을 맞아 18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초청 강연회를 열었다. 주인공은 중국 베이징(北京)대 국제관계학원의 왕지쓰(王緝思) 원장이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 주석의 측근으로, 외교.안보 브레인으로 불리는 거물이다. 이날 강연을 들은 한 기자는 "북.중 관계, 미.중 관계, 그리고 북핵 사태에 관한 탁월한 식견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평했다. 그러나 하마터면 이런 유익한 강연회가 무산될 뻔했다.

뒤늦게 밝혀진 사연은 이렇다. 왕 원장은 이달 초 여행사를 통해 주중 한국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다. '대장금'의 나라를 동경해 온 아내에게 한국을 보여주기 위해 부부가 함께 갈 작정이었다. 과거에도 여러 번 방한한 적이 있는 그는 비자를 쉽게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예상은 어긋났다. 한국 영사관이 그의 비자 신청을 거부한 것이다. 왕 원장은 자신의 비자가 거부된 이유도 알지 못했다. 중국인의 불법 입국을 막기 위해 한국 측이 비자 심사를 까다롭게 하나보다 했단다. 황당했지만 왕 원장은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거나 외교 채널을 동원해 청탁을 하지는 않았다. 한국행을 포기할 요량으로 그는 초청자 측에 "비자가 거부돼 갈 수 없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다급해진 쪽은 관훈클럽이었다. 어렵게 초청을 성사시켰는데 주인공이 불참하면 행사를 망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관훈클럽 측이 뒤늦게 발로 뛴 덕분에 그는 8일 다시 비자를 신청했고 결국 발급받았다.

이에 대해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공식 기록상) 1월 8일 비자를 신청해 5일 만에 정상 발급됐다. 그 전에 신청한 비자 관련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창구 직원이 서류 미비를 이유로 비자 접수를 거부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일을 전해 들은 베이징의 한 한국인은 "우리 정부의 중국 인맥 관리가 얼마나 엉성한지 엿볼 수 있게 한다"며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겨 버리기 어려운 사건"이라고 꼬집었다. 불법 입국자를 막기 위해 심사를 엄격히 하는 것은 대사관의 당연한 임무다. 하지만 중요 인물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이 일하다 손님을 쫓아 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곤란하다.

장세정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