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이 익기를 기다리는 지혜/김주영(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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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숙원이었던 지방자치제 법안이 통과되었을때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 공간에 대한 신선한 세척감을 맛보았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기대와 안도감을 함께 느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는 지방자치제가 어째서 민주주의의 꽃이 되는 것인지 명료하게 헤아리지 못하면서 덩달아 기대에 찼던 일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막연하나마 중앙집권제의 전횡이나 병폐에서 벗어나 내 살림의 경영은 내 스스로의 맵짠 손으로 다스리고 해결하며,권리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백성된 자긍심을 갖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방자치제를 민주주의의 꽃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대와 안도감은 한때
이제 오늘로서 그로 인한 두번째의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처음에 느꼈던 기대와 안도감은 물거품이 되고 무언가 구정물을 뒤집어쓰는 꼴은 아닌가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느낌이 가슴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느낌을 받게된 연유는 대개 이렇다.
지방의회의 의원후보로 나선 많은 출마자들은 이른바 자신들이 당선되었을 경우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지를 올바르게 인식하거나 그 분수를 지키려는 열기는 관심이 없거나 소홀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들의 말과 당선운동의 방법은 내고장의 살림을 슬기롭게 꾸려나가자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저질러서는 안될 일들이 많다. 억대의 돈을 건네주고 공천을 따낸다는 것은 그 출마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자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공약 역시 허황된 정치꾼들의 발언을 능가한다. 그들은 억대의 운동비용을 뿌려댐으로써 신선한 인물을 바라는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다. 아침 저녁으로 배달되는 신문에는 그들이 돈을 어디에다 쓰고 있는지를 속속들이 증언해 준다. 그것은 마치 사생결단의 도박판을 방불케한다.
꽃이라해서 모두 꽃은 아니다. 꽃중에는 독의 열매를 겨냥하거나 마약을 잉태하기 위해 피는 꽃도 있지만 우리는 그 모두를 이름하여 꽃이라 부른다. 때로는 그러한 꽃들이 바라보기에 더욱 아름답기조차 하다. 지방자치제를 민주주의의 꽃으로 평가하기에 거리낌을 주지 않았다면,그리고 독을 잉태한 열매를 먹지 않으려면 그것을 막아야할 필연적 의무도 우리에겐 있다.
독성으로 피어나려는 꽃을 바라보면서도 그대로 방치한다면 필경 미련한 백성이란 평판을 듣게될 것이다.그러나 그런 좋지 못한 별호를 갖는 백성으로 남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말만 무성한 정치판도
이런 난장판을 바라보면서 또한 느끼게 되는 것은 정치만이 모든것을 해결해준다는 착각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다. 그런 착각과 조급함이 은연중 그들을 부추겨 오히려 말만 무성한 정치판도를 만든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앞으로 치러야할 많은 선거들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후보자들이 결연한 태도로 내쏟고 있는 수많은 공약들도 생각해 보자. 그들 공약이 실현되기까지는 세습적 노력과 역사적 시간이 소진되어야 한다는 것을 미숙한 백성들일지언정 이미 많은 경험으로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모순에 가득찬 거짓말을 쏟아놓게 만드는 것은 백성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유권자들의 의식수준을 가볍게 바라보고 있거나,아니면 우리들이 가진 심성의 약점을 재빨리 읽은 때문이 아닐까.
장을 담가놓고 맛이 익기를 넉넉한 시간을 두고 기다릴줄 알았던 지혜와 너그러움,뒤곁에 심은 나무에 열린 감이 가을 햇살 하나만으로 농익은 홍시되기를 기다렸던 느긋한 심성을 가진 사람을 백안시하는 풍토가 사라지지 않는한 앞으로 있을 많은 선거의 거짓말은 산처럼 쌓이게 될 것이다.
하루 아침에 떼돈을 번 사람을 두고 우리는 졸부라 해서 탐탁잖게 여긴다. 또 그런 사람이 잘난체하고 설치면 비윗장 사나워한다. 그런데 내 스스로를 꼼꼼하게 헤집고 보면 뭔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민주주의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기를 바라고,통일도 빗장 열면 대문 열리듯 하루 아침에 덜컥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순서와 절차에 무리가 있을지언정 그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내 피붙이를 다스린다거나 이해관계가 내 자신과 직접적으로 간여된 문제에는 순서와 절차를 꼼꼼하게 따져야 올곧은 태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민주투사가 되면 성급해진다.
○하루아침에는 안된다
정치에 대한 맹목적이고도 성급한 기대감이 부지불식간에 우리들 의식에 자리잡게 되면서 저들로 하여금 실성한 사람들처럼 분수없이 돈을 뿌리게 만들고,공약을 남발하게 만드는 빌미가 된 것은 아닐까. 허튼 공약인들 속시원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은 또한 아닐까. 그러나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설사 그런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자리매김은 필경 위태로울 수 밖에 없다. 우리들이 가진 역사적 경험이 그 교훈을 일깨워준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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