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미 FTA 깨자고 국가기밀을 빼돌렸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 보고서는 정부가 6차 본협상을 앞두고 국회 한.미 FTA 특위에 비공개로 보고한 문건이다. 정부가 국민을 대신해 벌이는 협상인 만큼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들에게 정부의 전략을 알려주되 절대 외부에 공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보여준 것이다. 국가 간 협상은 국익을 걸고 싸우는 총성 없는 전쟁이다. 협상전략은 이 치열한 외교전쟁의 작전계획이다. 이걸 공개한다는 것은 작전계획을 적에게 다 알려주고 아군을 전장에 내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시에 작전계획을 적군에게 넘겨주는 일은 간첩죄나 반역죄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행위다. 한.미 FTA란 외교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을 우리 국회의원 중 누군가가 저질렀다.

이에 앞서 방송위원회는 한.미 FTA의 방송개방 협상전략에 관한 내부 문건이 외부에 유출돼 자체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국익이 걸린 국가 기밀문서가 다른 사람도 아닌 국회위원과 정부위원회 인사에 의해 빼돌려져 시중에 공표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직 기강이 무너진 것은 차치하고라도, 이런 나라에서 과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온전하게 지켜질 수 있을지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에서는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워 이들의 국가 기밀 유출행위를 정당화하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알 권리'에도 한계가 있다. 국기(國基)를 무너뜨리고, 국익을 훼손하면서까지 온 국민이 국가 기밀을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국가 간 협상이 진행 중인 사안과 관련된 전략과 기밀을 '알 권리'의 대상으로 삼아 공공연하게 까발리도록 허용하는 나라는 없다.

도대체 우리 국민 가운데 누가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협상의 구체적인 전략과 내부 기밀을 알려 달라고 했는가. 우리는 한.미 FTA 체결에 반대하고, 협상이 깨지기를 원하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협상전략과 내부 기밀이 만천하에 공개되면 당연히 협상이 결렬될 공산이 커진다. 우리 측의 협상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협상카드로 제시된 분야에 이해가 걸린 국내의 당사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반대에 나설 게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한.미 FTA는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 설사 협상이 타결된다 해도 국내 합의가 불가능해진다. 협상전략과 기밀문건을 유출한 사람들이 노린 것은 '국민의 알 권리'가 아니라 바로 '한.미 FTA 무산'이라는 의혹이 짙은 이유다.

그러나 아무리 한.미 FTA를 반대한다고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이번 기밀문건 유출은 그 선을 넘었다. 특히 민의를 대표한다는 국회의원과, 고위 공직자인 방송위원이 국가 기밀을 유출했다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그 자리는 사사로이 정보를 빼돌리라고 만들어 준 자리가 아니다. 개인적인 신념과 정책에 대한 찬반을 이유로 공직을 이용해 기밀문건을 마음대로 유출했다면 이미 공직자로서의 자격을 잃었다. 이들에 대해서는 문건의 유출 경위를 철저히 조사해 법적.도덕적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한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이 정부 들어 국가 기밀의 유출행위가 국회는 물론 청와대에서까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공직자 개인의 이념적 지향에 따라 국가안보와 관련된 기밀문건이 빼돌려지고, 사사로운 인맥을 통해 유포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나라의 안위가 걸린 정보가 어느 구석에서 새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라도, 어쩌면 평생을 두고 지켜야 하는 것이 국가 기밀이다. 차제에 국가 기밀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이를 유출하는 행위를 뿌리 뽑을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대책이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