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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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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국내에서 활동하는 외국 기업들도 한류 바람인가.

한국 지사 발령을 받고 까다롭다는 한국말을 애써 배우겠다는 외국인 경영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애주가라면 폭탄주 몇 잔쯤은 예사로 마신다. 르노삼성자동차처럼 문화 마케팅을 국악 등 우리 전통문화 지원에 집중하는 외국계 기업도 부쩍 많아졌다.

TV 광고에까지 출연해 인기를 모았던 닉 라일리가 미 GM의 아태 본부 사장으로 영전해 상하이로 떠난 지 반 년이 지났다. 하지만 GM대우 사장 시절 강성 노조를 변화시킨 소주 삼겹살 '스킨십 경영'은 요즘도 입에 오르내린다. 지난해 연말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에 연임한 윌리엄 오벌린 보잉코리아 사장은 우리나라 근무 20년에 한국인 부인을 둔 한국통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기업문화를 제대로 해외에 뿌리내릴까' 하는 것이 세계 경영계의 화두로 떠오른 점을 상기하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기업문화는 흔히 기업의 '얼'이자 '무형자산'으로 불린다. 선진 다국적 기업들은 길게는 100년 넘게 가꿔 온 기업문화를 소중히 간직하면서도 이를 진출하는 나라의 정서와 토양에 맞게 뿌리내리려고 애써 왔다. 한류를 연상케 하는 주한 외국계 기업들의 요즘 분위기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의 빗장을 활짝 열어젖힌 한국 땅에서 '글로컬라이제이션(국제화와 현지화의 합성어)' 작업이 본격 개시됐음을 뜻한다. 한국외국기업협회 1600여 회원사의 최고경영자(CEO) 중 60% 이상이 어느새 한국인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리 간판 대기업들의 기업문화는 어느 정도까지 세계를 향하고 있을까. 중앙일보와 아주대가 공동으로 조사한 내용(1월 9일자 이후 5회 연재)을 보면 삼성.현대자동차.LG.SK 4대 그룹의 기업문화는 외환위기라는 큰 시련 속에서도 나름의 존속 발전을 거듭해 왔다는 점에서 다행스럽다. 다만 기술이나 품질 같은 '하드' 요소에 비해 기업문화나 브랜드 같은 '소프트' 요소는 여전히 선진 다국적 기업에 적잖이 밀린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가령 해외 사업장에서 '빨리빨리'나 '집합주의' 같은 우리 습성을 고집하다 현지인들을 자극하고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욕심을 좀 더 내자면 3M의 '15% 규칙'이나 GE의 '식스시그마'처럼 경영학 교과서에도 오르고 세계적으로 통용될 한국발 기업문화를 만들 수 없을까 하는 기대도 해 본다.

홍승일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