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제11회 삼성화재배 세계 바둑 오픈' "버리는 것은 날카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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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제11회 삼성화재배 세계 바둑 오픈'

<4강전 2국 하이라이트>
○ . 백홍석 5단 ● . 이창호 9단


장면도(56~69)="백이 다 죽었다. 망했다"고 걱정하던 조훈현 9단의 표정이 62 무렵부터 야릇하게 변하더니 기어이 "이건 흑이 망한 건가"하는 혼잣말로 바뀐다. 고개를 흔드는 그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하다.

그렇다. 흑은 백을 잡았지만 백은 그보다 더한 것을 얻었다. 망한 쪽은 흑이다.

"돌이 달아나는 것은 비겁하고 돌을 버리는 것은 날카롭다"던 옛 고수의 말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다.

수순을 보면 56으로 웅크린 수부터 69로 이은 수(백?의 곳)까지는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완벽한 외길 수순이다. 회돌이와 조여붙이기 등 가장 원초적인 수법들을 총동원하여 흑의 외곽을 싸바르고 있다. 귀의 흑집은 37집이나 되니까 작지 않다. 그러나 백은 62를 얻었고 66, 68의 두터움에 A도 선수다. 좌하 백집은 물샐틈없이 견고해졌고 하변에서 중앙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엔 하얗게 눈이 뒤덮여 감히 접근하기 힘든 요새로 변했다.

결국 이 싸움에선 이창호 9단이 백홍석의 전략에 걸려들었다. 걸려들었다기보다는 백홍석의 사석전법이 실로 날카로워 천하의 이창호조차 감히 피해갈 수 없었다. 바둑 10결 중 세 가지 버릴 것을 주문하고 있다. 사소취대(捨小取大), 기자쟁선(棄子爭先), 봉위수기(逢危須棄) 가 그것이다. 사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며 돌을 버리고 선수를 잡는 것, 그리고 위기를 만나면 마땅히 버린다는 이런 정도는 웬만큼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러나 막상 바둑판 앞에 앉으면 돌을 버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바둑은 이제 백이 상당히 우세해졌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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