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인재들(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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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퇴계는 4대에 걸친 임금아래서 40년 가까이 관직을 가졌다. 그러나 그동안 일곱번이나 사직하고 향리에 내번이나 학문과 교육사업에 보다 진력했다.
명종이 여러차례 불렀으나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조정에 나갔으나 이내 임금이 죽자 다시 칭병하여 사직했다. 이때 율곡이 퇴계를 찾아가 『어린 임금이 즉위하니 어려운 일이 많고,또 도리로 보아 선생께서 물러갈 수 없다』고 간곡히 만류했다. 이에 퇴계는 『도리로 보면 그러하나 내 일신상으로 보면 몸에 병도 많거니와 재주 또한 미치지 못하니 물러가지 않을 수 없다』며 굽히지 않았다. 율곡이 다시 『벼슬한다는 것은 본래 남을 위하는 일이지 어찌 자신을 위하는 일이겠는가』하고 다그쳤다.
이에 퇴계는 『벼슬이라는 것은 실로 남을 위하는 일이다. 따라서 만약 남에게 이익을 미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면서 끝내 사양했다.
퇴계는 후에 시로 읊기를 「부귀는 뜬 연기와 같고,명예는 나는 파리 같더라」고 했다.
관직에서 정사를 돌보는 것은 나라를 위한 봉공의 길이다. 학문을 탐구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 역시 국가에 대한 봉사가 아닐 수 없다. 높은 관직에서는 자기의 이상과 경륜을 펼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부귀와 명예를 덤으로 얻을 수도 있다. 퇴계가 이를 연기와 날파리로 여긴 것은 그의 강직한 선비정신에서 비롯된다.
그가 그토록 벼슬을 싫어한 것은 자신이 사화의 피해자일 뿐만아니라 당쟁으로 인한 정치판의 혼돈에 대한 혐오 때문인듯 싶다. 상황이 자기의 뜻을 펴기에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광복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고위관직에 발탁됐다. 그중에는 존경받던 석학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시적인 정치적 소모품 노릇으로 그쳤을 뿐 큰 업적을 남긴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학계와 관계 양쪽에서 시체말로 스타일만 구긴 것이다.
학계의 인재들이 현실정치에 참여하려면 먼저 자기의 이상을 실천해볼만한 현실적 상황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들이 현실개선에 기여하지 못하면 결국 자기 「재주」를 과신했거나 부귀와 명예를 탐했다는 누명을 면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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