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공존하는 통일논의(장두성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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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한도 유엔가입 신청서를 내겠다는 북측 발표문을 읽으면서 환상적·정치선전적 통일논의의 큰 받침돌 하나가 허물어져 내리고 있다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 것은 비단 어느 누구 혼자만의 감회는 아니었을 것이다.
순진한 감상에서 통일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오는 봄비처럼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리라 믿는 낭만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은 충격이었을지도 모른다. 북한 외교부 발표문이 솔직히 시인했듯이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은 형식상으로는 분단의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의 조선」을 부인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이번 선택이 남한측이 조성한 「일시적 난국」 때문에 불가피했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북과 남이 유엔에 따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오늘의 사태는 절대로 고착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이 「난국」은 반드시 극복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을,그 말뜻도 모르는 세살난 북한 어린이의 눈물어린 구호로,현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신화로,또 허망한 신앙으로 받아 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이 결정은 현실성 있는 통일논의로의 새로운 출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미를 갖게 된다.
남들은 한반도를 냉전시대의 마지막 유물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정작 냉전의 주역들은 지금도 서로 핵무기를 겨누고 있으면서도 서로 악수하고 공존과 화해를 이야기하며 소련에 시장경제체제를 이룩하기 위해 1천억달러를 주거니 받거니하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터에 끈이 떨어져나간 꼭두각시들만 남아 계속 주역들의 옛 다툼을 계속하고 있는 꼴이 되어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 책임이 어느쪽에 더 있고 덜 있고를 새삼 따지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안될지도 모른다.
역대 우리 정부도 통일의 환상을 내정조작의 수단으로 이용한 적이 분명 있었다. 결코 상황은 하루 아침에 통일이 이루어질 수 없는 냉혹한 대결구조에 얽매여 있는데도 마치 그것이 가능한듯 온갖 상징조작들을 해댄 것은 북한만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과 북은 엄연히 두개의 서로 다른 체제·정부,그리고 이를 방어하기 위한 거대한 군사력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통일을 향한 분명한 출발선을 긋는 작업이다. 북한이 한사코 반대해온 유엔동시가입 결정은 이 작업을 향한 첫걸음이다.
그 첫걸음이 통일로 가는 긴 여정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명분이상의 큰 의미가 없는 국제기구에서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는데 그치지 말고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마련될 쌍방간의 각종 모임에서 그것이 거듭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말로만 해온 「서로 상대방을 전복이나 흡수의 대상으로 삼지않고」,같이 자주·평화·민주화를 이룩하는 공존의 동반자로 대하고 믿게 될때 그 너머에 통일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엔 동시가입이 갖는 상호실체인정은 뉴욕으로부터 한반도의 현장으로 가져와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허황된 환상으로서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세계에서 무엇이 상호 신뢰구축을 위한 벽돌이고 무엇이 그것을 깨는 다이너마이트인지를 남북 주민들 앞에서 분명히 재확인하고 하나하나 통일의 벽돌을 쌓아 나가야 한다.
그것이 신앙으로서의 통일,환상으로서의 통일,허구로서의 통일을 거부하고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민족의 화합으로 가는,어렵지만 확실한 길임을 확신한다.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이 그길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다음 단계로 이른바 「상황의 이중성」을 깨는 작업으로 나가야 된다. 그것은 북한이 한편으로는 대화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전략을 구사하는 양면작전에서 주로 비롯되고 있다.
이를 깨는 작업은 북한이 유엔동시가입을 마지못해 삼키는 쓴약으로 생각하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당장은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이 후유증으로 북한은 유엔을 경쟁의 새로운 무대로 삼을 수도 있고 고위급 회담등 각종 회담을 계속 지연시킬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일단 형식상으로나마 북한이 현실 인정으로 돌아선 이상,시간은 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세력이 국제외교무대의 일원이 되고나면 국제적 규범에 따른 책임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그것을 무시하는 행동보다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북한의 경우 그것은 다른 모든 구공산국들과 마찬가지로 서방세계와의 교류와 거기서 오는 정치·경제적 고립상태로부터의 해방이 될 것이다.
그것은 지금 북한이 처해있는 난국을 헤쳐나갈 거의 유일한 길이다. 북한에 만약 실용주의적 관료엘리트가 존재한다면 이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남한이 앞으로 추진하는 대북 정책은 이들의 입장을 강화시켜주는 쪽으로 비중이 두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유엔에서 시작된 환상적 통일논의의 파괴작업은 현실에 바탕을 둔 상호공존의 통일논의의 건설적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본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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