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경찰청장 파출소에서 야근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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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오후 10시36분.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 정문 옆의 종로동부지구대(통합파출소)에 뜻밖의 야근 근무자가 출근했다. 15만 경찰의 총수인 최기문(崔圻文) 경찰청장이다. week&팀의 요청을 받아들여 파출소 일일 야근 근무를 서기로 한 것. 최청장은 지구대에 도착하자마자 당직 책임자인 임양수 경위로부터 간단한 근무 수칙과 주의사항을 듣는다.

"유흥업소가 밀집한 데다 인근 종묘와 파고다 공원 주변에서 맴도는, 갈곳 없는 노인과 노숙자가 많아 사건.사고가 잦습니다. 하루에도 112 신고만 60~70여건, 폭행 사건도 7, 8건 정도가 들어옵니다."

"관내엔 금융기관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야간에 현금을 인출하는 고객을 노리는 범죄에 신경써주십시오."

최청장은 곧바로 상황 데스크에 앉아 신고 전화 접수 등 '야근'에 들어갔다.

"제가 1994년 종로서장으로 근무할 때 여러차례 들렀던 곳이어서 낯설진 않네요. 당시엔 주변에서 시위가 많아 출입문과 유리창에 쇠창살을 댔는데 그런 것들이 치워진 것 빼곤 말이죠."

최청장의 파출소 근무는 경찰 입문 직후인 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군 대위 출신으로 중간 간부(경정)로 경찰에 입문했기 때문에 수습기간 4개월 동안의 파출소 근무 경험이 전부다.

"제가 경찰에 들어올 때만 해도 경찰의 사기나 자부심은 거의 바닥이었죠. '경찰한테는 딸도 안주겠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나돌 정도였으니까요." 역시 감회가 남다른 모양이다.

"90년대 말까지도 일선 경찰에 대한 상급기관의 간섭과 감시.감독이 지나칠 정도로 심했죠. 그러다보니 파출소도 위(관할 경찰서)의 눈치만 봤고, 자율적으로 일하는 분위기는 찾기 힘들었어요. 요즘엔 정말 달라졌어요. 경찰공무원들의 학력은 물론, 직업에 대한 긍지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어요. 전문성도 생겼고. 며칠 전 주한일본대사를 만났는데, '한국의 치안 상황이 일본보다 낫다'는 칭찬을 들었지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황'이 발생했다. 만취한 70대 노인이 파출소 문을 박차고 들어와 최청장에게 시비를 걸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것.

잠시 난감해하던 최청장. 이내 음료수를 권하며 노인의 신원부터 파악한다.

"영감님 괜찮으세요. 이렇게 추운데 밖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저희가 집 찾아드릴테니 댁이나 보호자 연락처 좀 말씀해주세요."

그 사이 다른 야근자가 전산조회 단말기로 노인의 연락처를 바삐 찾는다. 노인은 쩌렁쩌렁하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더니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잠이 들어버렸다.

잠시 한숨을 돌린 최청장이 일선 경찰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지난 8월 주변 서너개의 파출소를 하나로 합치는 지구대 개념의 파출소 시스템을 새로 도입했어요. 내근자를 줄이는 대신 현장 출동 인력을 늘리자는 생각에서였죠.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지만, 그래도 워낙 일손이 부족해 걱정입니다."

서울이나 지방 대도시는 그나마 사정이 낫단다. 조금만 시골로 가면 사람도 순찰차도 부족하고, 교대 근무를 제대로 돌리기도 버거운 곳이 적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의무경찰 제도도 곧 폐지된다.

오후 11시40분. 최청장이 "순찰차를 직접 몰고 관내를 돌아보겠다"며 지구대 문을 나섰다. 유흥업소가 빼곡한 관철동 골목 일대를 먼저 찾았다.

"불경기 탓인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네요. 경기가 더 나빠지면 안되는데…. 카드 빚에 몰린 사람들의 범죄도 점점 늘고 있어요. 그나저나 요즘 강남 일대에 납치.강도 등 강력사건이 잦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에요. 사실 강남 지역 범죄율은 지난해보다 30% 정도 줄었지만, 유괴나 강도 같은 사건은 아무래도 국민들이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잖아요."

순찰차를 모는 와중에도 무전기로 상황 교신이 몇차례 오갔다. 다행히 오늘은 큰 사건 없이 새벽을 맞이하나보다. 오전 1시10분. 순찰 업무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지구대로 차를 돌리면서 최청장이 한마디 더 했다.

"야간 순찰도 만만치 않고, 격렬한 시위현장 근무는 말할 것도 없고...역시 직접 다녀보니 일선의 어려움이 피부에 와닿네요. 저는 특히 시위현장 등에서 부상해 병원에 누워 있는 동료경찰들에게 늘 미안한 심정입니다."

글=표재용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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