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뭇거릴 시간이 없다/유승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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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제 위기를 고조시켜온 치사정국도 일단 한 고비를 넘기고 공은 노대통령의 손에 넘겨졌다. 국민은 과연 그가 어떤 처방을 내릴 것인가를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지난 20여일간의 위기상황과 이에대한 시민의 반응을 통해 우리사회의 문제점들이 무엇이며 각 사회세력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그 요구 자체와 그 요구의 실현방법에 관한 국민의 지지와 호응도가 어떠한지도 별도의 여론조사가 필요없을 정도로 파악되었다고 믿어진다.
참으로 이제는 이런 충분한 재료를 가지고 어떤 식탁을 차려 놓을 것인지 요리사의 솜씨만이 궁금해지는 상황이다.
그 요리사로서 노대통령은 이번에만은 방향이 분명하고 앞으로 흔들리지 않을 결단을 내려야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사회가 이렇게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것도 구조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현정권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양면적이고 이질적인 통치스타일에도 그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노대통령이 속 마음이,비록 그속도는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나마 지속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는데 있는 것인지,아니면 권위주의체제를 유지하는데 있는 것인지를 도무지 알기가 어렵다. 6·29이후 한 2년동안은 분명히 개혁적인 몸짓을 보여주더니 이른바 공안정국이 시작된 89년 6월부터는 완연히 권위주의적인 징후들을 불쑥 불쑥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가하면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초기에는 경제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각종 정책을 추진하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과거식의 성장위주의 정책으로 돌아서 버렸다. 뿐만아니라 지난날 지나치게 비대해졌던 각종 권력기구에 대해서도 그를 축소하는듯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알게 모르게 그 실질적 권능은 그대로 유지하고 때로는 확대하기까지 했다.
또 그러면서도 지자제실시,보안법개정등에서 보듯 알맹이는 불분명하되 개혁의 형식만은 갖추려는 몸짓은 그런대로 지속해 오기도 했다.
이러한 일관성없고 양면성있는 정책의 추진이 급진세력이나 개혁지지층은 물론 가장 보수적인 층으로부터도 불신과 불만을 낳는 근원이 되어온 것이다.
노대통령 자신의 생각이 어떠한지는 모르나 그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그가 이른바 「벼랑의 정치」를 선호하는 것으로 지적해 왔다. 일단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그것이 갈 데까지 내버려두어 스스로 가닥을 잡을 때 비로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회의 자율성을 키우고 여론을 바로 수렴해 올바른 결단을 내리기 위한 인내와 신중이라면 나름대로의 가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숱하게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것은 인내와 신중이라기 보다는 무책과 주저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별다른 것을 내놓을 것이 없다면 차라리 빨리라도 결단을 내리면 그래도 나으련만 미루고 미뤄 국민의 궁금증과 답답증만 한껏 키워놓고는 기대에 반도 차지 않는 방안을 모양새만 내서 내놓곤 했던 것이 그동안의 사정이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그래서는 안될 것이다. 남은 임기도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더 이상 장고할 시간도 없다. 어떤 면에서는 결단을 내리고 그를 실천해 나가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굳이 여론조사결과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현 시점에서 다수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최소한 6·29 당시의 개혁적인 자세를 분명히 하고 개혁정책을 과감히 집행해나가라는 것임은 분명하다. 안정도 그러한 개혁을 통해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이 다수 여론의 믿음이다.
그러나 만약 당시와는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다면 차라리 그것이나마 분명히 밝히는 것이 훨씬 더 낫다. 그래야 그의 지지세력은 지지세력대로 단결을 공고히 할 것이고 비판하는 쪽은 비판하는쪽대로 방향을 가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란 어차피 선택이다. 모든 계층,모든 이념,모든 욕구를 골고루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정치란 실제로는 불가능한 법이다. 그런데도 때마다 화려한 추상명사들을 동원해 마치 그렇게 할 수 있는 양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국민을 속이는 일이 될 뿐이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국민들도 이번에는 무언가 답답증이 싹 가셔지는 수습책이 나오리라고 기대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20여일의 위기과정을 통해 표출된 요구중 상당수는 구조적인 문제요,또 그런만큼 장기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이번의 수습책에서 그 해결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나름대로의 색깔과 노선이라도 분명히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제는 벼랑의 정치는 끝내야 한다. 더 이상 밀릴 곳도 없는 상황이다. 하루라도 빨리 분명한 방향이 잡히기를 기대하는 국민들을 앞에 놓고 또다시 시일을 허비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가 될 뿐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에게 필요한 사항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결단력이다. 노대통령도 이제는 사회의 요구에 대해 선택적인 승부수를 낼때가 되었다.
가장 나쁜 선택은 광역선거 등을 내세워 또다시 문제를 덮어버리고 결단을 미루는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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