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 겪는 종정 선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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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조계종단이 최근 들어 종정의 빈자리를 놓고 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 지난 1월9일자로 10년 임기를 채우고 물러앉아 이성철 스님의 뒤를 이을 차기종정이 공석 4개월여가 지나도록 선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종정 선출문제가 이처럼 오랜 무위 속에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88년 개정된 종헌 및 종정 추대 조례를 둘러싸고 원로회의와 종회측이 한치도 양보할 기색 없이 서로 팽팽히 맞서있기 때문이다.
개정된 종헌의 종정 추대 조례를 보면 종정은 원로회의위원과 종회가 뽑은 추대위원 등으로 구성되는 종정추대위원회에서 선출하도록 돼있다. 종정추대의원회의 회의가 성립하려면 재적 과반수, 거기에다 반드시 원로의 과반수가 참석해야한다는 까다로운 단서를 충족시켜야 한다.
조례에 따라 지난 2월1일 제103회 임시 종회에서 원로회의위원 21명, 종회측 추대위원 31명 그밖에 총무원장 등 당연직 3명을 더한 총55명의 종정 추대위원회가 발족됐다. 불국사21명중 과반에 못 미치는 10명만 나오는 바람에 성회가 되지 못했고, 5월의 두번째 회의에는 과반수를 운위하기에 앞서 원로측 위원이 아예 단 한명도 나오질 않았다.
원로들이 종정추대위원회를 거부하는 이유는 개정종헌의 제21조와 함께 종정추대 조례법 자체가 절차를 무시한 채 이루어진 무법한 것이라는데 있다. 88년 종헌 개정 때 원로회의 측은 적어도 종정추대규정에 한해서만은 인준을 해준바가 없으며 따라서 종회측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개정종헌은 전혀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종헌이 개정되기 이전 그대로 종정추대의 일만은 반드시 원로회의 고유권한으로 귀속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물론 종정선출이 지연되는데는 이 같은 표면적인 현상의 뒷면에 문중간의 해묵은 경쟁과 종권을 가운데 둔 치열한 헤게모니 싸움이 개재해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종정은 한 종단의 가장 윗자리에서는 어른이며 성과 속을 아우르는 믿음의 지도자다.
더욱이 우리나라 최대의 교세를 자랑하는 불교, 그 불교와 거의 등식으로 연결되는 조계종 종정이 갖는 영향력과 상징적 의미는 시로 막중한 것이다. 이렇듯 중요한 자리이기에 조계종 종정은 단순히 손발 한번 움직이는 것으로도 신도나 일반에겐 관심의 과녁이 돼버리고 만다.
이유야 어찌됐든 현재 조계종은 종정 궐위가 1백30여일이나 지속되는 심각한 유고상태에 있다.
불기2535년 올 부처님오신날을 맞으면서도 사람들은 해마다 듣던 종정의 청량법어를 대할 수 없게됐다. 누군가는『제주와 축문 없이 제사를 지내는 격』이라고 지적했지만 중정의 오랜 궐위는 자칫 1천6백년 한국불교에 전승돼 오는 정통의 법맥을 단결시킬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높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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