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지리아서 근로자 피랍 … 한 방에서 위기 모면한 박현덕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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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나이지리아에서 일하던 한국인 근로자 9명이 무장단체에 의해 10일 납치됐다. 서울 남대문로 대우건설 본사에 마련된 종합대책반 사무실 벽면에 피랍된 근로자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사진=김태성 기자]

피랍 근로자들과 같은 방에 있다 침대 밑으로 숨어 극적으로 위기를 넘긴 대우건설 나이지리아 현장의 박현덕(34) 대리는 "지옥에 갔다 온 느낌"이라며 아찔했던 순간을 회고했다. 기자는 11일 0시10분쯤 박 대리와 휴대전화를 통해 인터뷰를 했다.

-무장단체가 공격할 때의 상황은.

"새벽에 잠을 자다 폭음과 총소리에 놀라 깼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굉음이 한시간 이상 계속됐다."

-총소리가 날 때 어떻게 대처했나.

"A숙소(숙소 두 개 중 하나)에 있던 동료들이 깜짝 놀라 모두 뛰쳐나와 한 방으로 모여들었다. 누구 방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숙소의 현관문을 걸어잠그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숨만 죽이고 있었다."

-무장단체가 근로자들을 어떻게 납치해 갔나.

"총소리가 잦아들어 '이제 끝났구나'하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현장에는 무장한 사설 경비원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침입범들을 진압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현관문을 겨냥해 총을 쏘는 소리가 들렸고 총소리가 나자마자 순식간에 무장괴한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침대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침대 밑에서 20~30분간 죽은 듯 숨어 있었다. 무장괴한들은 급했는지 침대 밑까지 살피지는 않았다."

-납치범들이 한 말은.

"5~6명의 무장괴한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무빙(움직여라)''무빙'하며 영어로 서너 번 말했다. 동료들은 겁을 먹고 따라나갔다."

-다친 사람은 없나.

"납치범들이 떠난 후 이상복 현장소장과 피해자가 없는지 살펴봤는데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다른 숙소에 있는 동료들과 사설 경비원들 모두 무사했다. 형광등이 깨지고 건물 외벽에 총탄 흔적이 있을 뿐이다. 무장괴한들은 처음부터 누구를 해치려고 총을 쏜 게 아니라 자기들이 왔다는 걸 알리려고 허공을 향해 총을 쏜 것 같다."

◆대우건설 대책 부심=대우건설은 이날 서울 중구 남대문동 본사 22층에 피랍대책상황반을 설치하고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직원들은 지난해 말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새 주인으로 맞아 새 출발하는 과정에 이 같은 악재가 터져 당황해 하는 모습이다. 특히 지난해 6월에 이어 같은 지역에서 또다시 비슷한 피랍사건이 발생한 것에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지난해 6월 하커트항 남쪽 코손채널 유전 지대에 있는 DN-38 가스플랜트 현장에서 대우건설 직원 3명, 가스공사 직원 2명 등 총 5명이 납치됐다가 40시간 만에 무사히 풀려난 적이 있다.

대우건설 해외사업본부 정태영 상무는 "무장단체의 정체나 요구사항, 그리고 피랍 근로자의 위치 등을 파악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 중"이라며 "오전 10시30분(한국시간 오후 6시 30분)쯤 비선 채널을 통해 확인한 결과 피랍 근로자들은 모두 안전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회사 측에 따르면 피랍 당사자인 홍종택(41) 차장이 납치된 지 2시간가량이 지난 이날 오후 2시30분쯤(한국시간) 대우건설 나이지리아 사무소에 휴대전화로 피랍 사실을 알려왔다.

대우건설 관계자는 "정부 기관과 긴밀히 협조해 직원들의 안전 확보 및 무사 귀환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전익진.함종선 기자


"내달 휴가 온다 했는데 …"

애타는 가족들

"어제 전화했을 때 자기는 잘 있고 별일 없다면서 중2 아들이 학원은 잘 다니느냐고 물어봤는데…."

나이지리아 건설현장에서 근무하다 납치된 대우건설 이문식(45) 차장의 부인 홍모(40.서울 강남구 삼성동)씨는 10일 남편의 피랍 소식에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1994년 입사한 이 차장은 7년 전부터 나이지리아에서 근무한 베테랑이었다. 홍씨는 "오후 3시쯤 회사에서 전화를 받고 너무 놀라 자리에 주저앉았다"며 "아직 신변은 무사하다고 하니 외교부와 회사 측이 석방에 최선을 다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용민(32) 사원의 어머니 강경순(58.경기 부천시 소사본2동)씨도 "용빈이는 일주일에 서너 차례씩 안부전화를 하는 등 효심이 지극한 아들이었다"며 "엊그제도 전화를 걸어 몸 건강히 안전하게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런 일이 터져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2년 전 결혼한 박씨의 부인(28)은 3월 출산 예정이어서 주위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글=전익진·함종선 기자<jsham@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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