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인간 존엄성과 인격에의 길 제시|Ⅰ칸트 저 『실천이성 비판』|백종현<서울대 철학과 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20여 년 전 대학 문에 들어섰을 때, 무엇보다도 나에게 주어진 큰 행운은 마음 쫓기지 않고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던 점이었다. 학과공부 틈틈이, 그리고 특히 긴 방학중에는 어린 시절부터 제목만 외우고 있던 고전 등을 펼쳐 들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먼저 손에 닿은 것이「배우고 때로 익히면 역시 기쁘지 아니한가」로 글 문을 여는『논어』였다. 재주에서나 덕성의 면에서 치졸한 나로서는 글귀 마디마디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깊은 감명을 받았다. 더듬 더듬이「고전중의고전」의 지면을 며칠째 넘겼을 때「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했는데 오늘의 학자는 남을 위하는구나」(고지학자위기 금지학자위인「헌문」)라는 대목에 이르렀다. 옛날에「공부한다」는 말을 듣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수양을 위해 공부했는데 요즘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학식을 남에게 보이고, 그것을 수단으로 삼아 무엇인가 벌이만을 위해 공부하는 것은 아닌가.
2천5백년전 공자의 이 탄식은 내게도 따끔한 채찍이었다. 이 채찍의 아픔이 컸던 나는,「이제부터라도 나를 위한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록 그 결심의 성과가 크지는 않지만, 그 지향하는 바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논어』를 손에 든 것이 계기가 되어『사서』를 차례로 읽기 시작했는데 나가 사상의 총론이랄 수 있는『대학』의 경문과 부문은 한자도 빼지 않고 암송하기도 했다. 요즘도 가끔 이 옛사람들의 생각이 간직된 책장을 넘기면서 나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며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반성해 본다.
이런 관심을 가지고 고전의 지혜에 귀기울이던 중 큰 공감을 느낀 또 하나의 저술이 칸트(Immanue1 Kant;1724∼1804년)의 도덕철학 사상을 담은 『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munft,1788)이다.
칸트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인간의 「인격성」이고, 이 인격성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서 발견된다고 설명한다. 이 말은, 그러니까 역으로 만약 인간이 도덕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할 때 그는 더 이상 인간일수 없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도덕의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서양의 기독교윤리에서 그 도덕성의근원은「하느님의 음성」즉 계명에 있고 동양의 유교에서 그 도덕성의 원천은 『맹자』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본래적 자연본성이다. 그러나 칸트는 도덕의 근거를 이성적 인간의 선의 이념에서 찾는다.
칸트에 따르면 도덕은 선의표상이다. 그러면, 그 자체로 선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선의지」뿐이라고 칸트는 답한다. 선의지란 옳은 행위를 오로지 그것이 옳다는 이유에서 택하는 의지다. 그것은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는 마음이나 또는 자연적인 마음의 경향성에 따라 옳은 행위로 쏠리는 의지가 아니라 단적으로 어떤 행위가 옳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그 행위를 택하는 의지다.
그러므로 이 의지 작용에는 어떤 것이「옳다」, 무엇이 「선하다」는 개념이 선행해야하고, 그 개념은 바로 인간의 순수한 이성의 이념 내지는 이상이라는 것이 칸트의 파악이다.
선의지는 인간에게 자연적(선천적)소질로서 구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의지가 인간의 소질이라면, 인간은 자연적으로 선하게 행위 할 것이고 사실이 그러하다면 우리 인간이 악행을 할 리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모름지기 어떠 어떠하게 행위 해야만 한다」는 당위의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도덕의 문제는 당위의 문제다. 즉 인간이 수시로 악을 행하기 때문에 도덕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선의지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이상의 실천이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의「의무」라고 납득하는 데서 생긴다. 도덕은 당위이므로「하라」는「명령」으로 나타나며, 그것도 무조건적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인 실천명령으로 우리에게 부과된다. 그것은 명령이기 때문에 반드시 준수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칸트는 「실천 법칙」,혹은「도덕법칙」이라 부른다.
선의지만이 그 자체로 선하다는 칸트의 말은, 그러므로 결국,「의무로부터의 행위」만이 진정한 도덕적 가치를 가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의무로부터의 행위란 도덕적 실천 법칙을 그 행위의 표준, 즉「준칙」으로 삼는 행위를 말한다.
이성적 실천능력을 가진 존재자인 우리인간이 선험적으로 의식하는, 선의이념에서 주어지는 도덕법칙들의 최고원칙을 칸트는『실천이성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 하라.』(7절)
도덕적 행위는 기본적으로 인격체로서의 한 인간의, 역시 인격체인 다른 인간에 대한 행위다. 그러므로,「우리」인간이 물건과는 구별되는 사람인 한,「나」의「너」에 대한 행위는 언제나 인격적이어야 한다. 어떤 사람의「인간다움」은 그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행위가 인격적인가, 아닌 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독일어 판으로 1백60폭(칸트「전집」제5권에 수록), 한국어판으로 1백79쪽(최재희 역, 박영사)인 그다지 두껍지 않은『실천이성비판』은 구구절절이 인간의 존엄성과 우리인간이 단지「사물」에 머무르지 않고,「인격」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역설이 공허하지 않고 읽는 이에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나의 머리 위의 별이 총총히 빛나는 하늘과 나의 마음속의 도덕법칙」에 언제나 감탄과 외경의 마음을 지녔던 칸트의 혼이 그 안에 깃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단지 도덕의 논객이 아닌 도덕적 실천가였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