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한자리수 임금협상」|「밀고 당기기」중간 점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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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올해 임금협상이 정부의 한자리수 인상 지침을 크게 의식한 기업측과 극심한 물가고를 반영한 실질적인 인상을 요구하는 노조 측의 대립으로 난항을 겪고있다.
임금교섭 선도기업으로 지정돼 있는 재벌그룹을 포함한 많은 기업들은 정부의 강경한 태도로 운신의 폭이 좁아져 있는 반면 노조 측은 두자리수 임금인상을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협상은 서로 눈치보기 속에 지지부진한 상태며 아직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지 못한 곳도 많은 실정이다.
이와 함께 일부 기업에서는 정부와 노조 측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노사가 기본급이나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한자리수 인상에 합의한 뒤 대신 각종 수당을 신설, 또는 인상하거나 특별상여금을 지급하는 등의 방법으로 실질적인 두자리수 인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임금체계가 점점 왜곡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6일 노동부에 따르면 3일 현재 상시 근로자 1백명 이상 고용사업장 6천5백90곳 중 16·9%인 1천1백11군데 사업장에서 임금교섭을 끝내 지난해 같은 기간의 16·5%에 비해 진도가 빠르며 타결된 임금 인상률은 평균 8·9%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8·5%보다 다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투자·출연기관, 금융기관, 30대 그룹 주력기업 등 임금 선도부문 사업장으로 선정된 3백개소의 경우 33·3%인 1백개 사업장이 타결됐으며 인상률도 7·2%로 조사됐다.
노동부는 이 같은 통계를 근거로 『임금 한자리수 이내 인상 방침은 대체로 성공적』이라고 밝히고 『임금교섭 초기에는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였으나 임금 선도부문 사업장의 솔선수범으로 안정분위기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노동부의 이 같은 호언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이 문제다.
경제단체와 업계에 따르면 「모범을 보여야 할」40개 정부 출연기관 중 6일 현재 임금협상이 타결된 38개 기관 대다수가 임금을 20%이상 인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기관은 기본급 인상은 7∼8%에 그쳤으나 연구 장려수당·능률 제고수당·체력단련비 등을 대폭 인상했으며 갖가지 명목의 수당을 신설하는 등 편법으로 정부의 한자리수 인상선을 「앞장서」무너뜨렸다.
이 같은 방법으로 화학연구소가 최고 23%, 전자통신 연구소가 22%, 산업연구원이 20% 등을 인상했으며 아직 타결되지 않은 2개 기관(원자력 연구소·과학기술원)도 10%를 넘는 선에서 협상이 마무리될 전망이다.
30대그룹 5백39개 계열사의 경우 가장 눈치보기가 심해 임금협상이 끝난 곳은 삼성그룹의 23개사를 비롯, 선경·한진·동아·해태 일부계열사 등 40여개사에 불과하며 과거에 대규모 분규를 겪었던 자동차·전자·철강·조선업종 등의 대기업들은 아직 본격적인 임금 교섭에도 들어가지 못한 상태다.
이들 회사 가운데 H타이어의 경우 일단 8∼9%로 교섭을 끝냈으나 하반기에 있을 단체 교섭 때 각종 수당과 상여금의 대폭 인상을 회사가 약속, 사실상 20%가량의 임금 인상이 확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소 제조업체의 경우 한자리수 인상은 이미 무너진지 오래.
전노협·연대회의로 구성된 「임금인상 및 물가폭등 저지를 위한 전국노동조합 공동투쟁 본부」(공투본)에 따르면 6일 현재 산하 제조업체 노조 4백58곳 가운데 13·3%인 61곳에서 임금교섭이 타결됐으며 타결 임금인상률은 기본급 기준 21·3%인 것으로 조사됐다.
인상률별로는 30% 이상이 2곳, 25∼30% 미만 8곳, 20∼25% 미만 14곳, 15∼20% 미만 11곳, 15% 미만 4곳이었으며 가장 높은 곳은 항진산업(성남)의 34·8%, 가장 낮은 곳은 부경 어패럴(서울)의 13%였다.
공투본은 『임금인상 요구안을 확정지은 3백55개소의 평균 인상 요구율은 26·5%인데 대부분 이 숫자에 가깝게 타결될 것으로 본다』며 『이 같은 상황으로 미뤄 정부의 한자리 수 고수방침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노총의 경우 현재 임금교섭 현황을 집계중인데 산하 노조의 타결률은 20% 미만이며 임금 인상률은 18%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타결된 업체를 보면 ▲금강유리 20% ▲삼부 스티로폴 17% ▲동화약품 16% ▲동아제약 13·1% 등이다.
이처럼 정부의 한자리 수 임금 인상정책이 현장에서 외면 당하고 있는 것은 소비자물가의 상승(지난해부터 올 3월 말까지 14·3%)으로 근로자들의 실질소득 보전 욕구가 강하고 걸프전쟁의 종결과 유가안정 등으로 경기회복세가 뚜렷해 정부의 경제위기설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노총 정책 연구실의 한 연구위원은 『사실상 한자리수 임금인상이 깨진 상태에서 정부가 직장폐쇄·여신규제 등을 들먹이며 한자리수 고수를 독려하는 바람에 협상이 예년보다 한달 이상 지연되고 임금체계 왜곡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며 『정부는 별 근거도 없는 한자리수를 고집하지 말고 노사 가율에 맡겨 합리적 타결을 유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동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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