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미국병 사회간접시설 엉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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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미국에서 요즘 도로·교량·공항·상하수도 등 사회간접시설이 노후화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각종 사고가 빈발해 국민생활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으며 기업들은 생산성이 하락, 결국 미국 상품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것이라며 빠른 대책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사회간접시설 노후화는 우리 나라가 요즘 겪고있는 사회간접 시설의 부족과 약간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아직까지 투자가 제대로 안돼 시설이 크게 부족한 상황인 반면 미국은 시설부족보다는 기존 시설이 너무 낡은데도 이에 대한 유지·보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미국에서의 사회간접시설 노후화는 정부가 재정난을 이유로 공공투자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신규 공사는 물론 보수마저 제때 못했다.
미국 연방정부의 사회간접시설에 대한 투자는 70년대 닉슨·포드·카터 대통령 시절만 해도 연평균 15∼19%정도 증가추세를 보였다.
그러나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면서 이 부문에 대한 투자가 더욱 소홀해졌다. 그 첫 임기(81∼84년)에는 투자비가 오히려 5% 줄었으며, 2기(85∼89년)에도 6%증가에 그쳤다.
특히 도로·교량·지역개발 예산이 축소돼가고 있다. 연방정부로부터 보조금이 줄어드는 데다 주·시 당국에서도 주된 자금조달원인 지방채 발행여건이 계속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재정·무역적자에 이어 「제3의 적자」로까지 불리는 사회간접 시설의 노후화 때문에 당하는 사고가 적지 않다.
최근 뉴욕시내에선 공을 주우려던 한 소년이 함몰된 도로 아래로 떨어져 숨졌다. 맨해턴 고속도로를 달리던 한 오토바이 운전자는 길가 옹벽에서 떨어져 내린 콘크리트 조각에 맞아 숨졌다.
89년 10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지진 때 2층 고속도로가 무너진 것도 보수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선 교량의 내구한도를 25년 내외로 보고 있는데 가설된지 50년이 넘는게 많다. 지난 4월 뉴욕시 조사에 따르면 시내 교량 중 69%인 1천4백5개가 함몰위험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로도 포장상태가 계속 나빠지는데 보수·덧씌우기 공사가 되지 않고 있다. 알래스카·미주리·미시시피주 등에선 함몰위험성이 있는 도로가 4할대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공항 또한 시카고·아틀랜타·LA가 세계공항중 초과밀 공항 랭킹 1∼3위로 알려져 있다. LA공항에서의 연간 항공기 발착횟수는 59만회(89년)다.
3분에 1대 꼴로 이·착륙하는 셈으로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는 지적이다.
상수도는 노후화가 심해 수도관 파열 건수가 매년 늘어 뉴욕시의 경우 지난해 6백50건에 이를 정도다.
경제계에선 50∼7-0년대 사회간접시설에 대한 투자가 큰 폭으로 늘어났을 때는 생산성이 높아졌는데 71∼85년엔 사회간접투자 축소로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연방·주정부가 함께 재정난에 허덕여 공공자금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고속도로·교량 등에서 통행료를 새로 받거나 올리는 사례가 늘어나고, 민·관 합작 투자방안이 모색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부시 대통령은 최근 92년도 예산안에서 앞으로 5년 동안 2백억달러를 투자, 고속도로·교량건설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 하원의 공공사업 운수위원회는 그것 만으론 불충분하다며 휘발유세를 올려 이중 절반 정도를 사회간접 시설 투자에 쓰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현재 미 연방 정부의 재정상태로선 대폭적인 공공투자확대가 어려워 이 때문에 걸프전에서의 승리감 뒤에 또 다른 「미국병」이 서서히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박의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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