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된 선율에 잔잔한 감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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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지난 5일밤 예술의 전당에서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키스트라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지휘에 마르크 에르믈레르, 피아노에 이경숙 이었고, 베버의 『오베른 서곡』,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5번』이 연주되었다.
음악회의 경우 일반적으로 관심의 종류에 둘이 있다.
음악과 상관이 「없는」 관심과 「있는」관심이다. 연전에 모스크바 교향악단이 서울에 처음으로 왔을 때에는 음악과 상관이「없는」관심으로 우리들의 가슴이 설렜다. 「모스크바」라는 말 그 자체가 관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제주도까지 왔다 간 지금의 사정은 참으로 다르다. 이번 공연이 음악과 상관이 「있는」관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차이코프스키는 소련 작곡가다. 이번 연주에서는 상식적인 기대치와 는 달리 소련 사람이라고 해서 소련 음악을 독일이나 미국 사람들보다 더 잘 연주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게 했다.
이 말은 차이코프스키 음악은 이미 소련인 만의 음악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며, 언어와 풍습이 서로 달라도 차이코프스키 음악의 수용방식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같은 성걱을 띠기도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국인들까지도 소련인들의 연주를 들을 줄 알지 않는가.
세계 일류 교향악단의 경우 대부분이 그러하지만, 모스크바의 경우도 현이나 관악기들은 참으로 알차고 부드러웠다.
완벽한 앙상블을 연주해내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정제미와 균형미를 창출해냈다.
지휘자 에르믈레르의 음악 해석법이 필자의 개인적 음악 취향에 반드시 공감된다는 뜻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훌륭한 연주라고 해도 사람에 따라 그 객관적 훌륭함에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이날 밤 필자에게는 피아니스트 이경숙이 대단스러워 보였다. 문자 그대로의 세계적 교향악단과 협연을 당당하게 치러내고 있는 한국 연주가가 국내에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 필자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이 나라 음악문화의 바람직한 발전에는 음악가의 「마음」만이 아닌, 「몸」의 처소도 중요하다. 이경숙은 그것을 우리에게 무언으로 시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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