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숙의원 신민당최고위원/44년만에 다시 가본 인상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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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고향 평양 이게 아닌데…”/사람도 건물도 모두 회색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세상이 바뀌기 시작해 어머님·할머님·여동생들과 함께 고향 평양을 떠난것이 해방후 2년뒤인 47년 가을. 15세 때였다.
나는 이제 44년만에 떠나온 길을 되짚어 고향으로 향한다.
대동강을 가로지른 대동루 저왼쪽편 능라도로 소풍을 갔더랬지… 시내 고려호텔 지배인의 딸이 친한 친구였었는데… 그애를 만나러 호텔로 가면 그곳에 연금돼 있었던 고당 조만식 선생이 옥상위를 팔짱끼고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는데….
4월27일 판문점을 통해 북녘땅을 밟은뒤 개성에서 갈아탄 평양행 기차속에서 나는 이제 60문턱에서 소녀시절을 떠올리며 「고향추억」의 파편들을 주워담고 있었다.
8박9일간의 짧고 제한적인 여정이었으나 나름대로 경험하고 느낀것을 하루만에 정리하기엔 너무나 많은 생각의 줄기들이 부딪치고 있다는 점을 먼저 말해두어야겠다.
어린시절 평양의 기억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대동문과 보통문,연광정의 세 유적뿐이었다.
안내원은 6·25당시 미국의 완전 폭격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평양에서 볼때 대동교 오른쪽의 양각도는 고층의 양각호텔과 양각경기장으로,왼쪽의 능라도는 5·1(메이데이)인민대경기장으로 개발돼 과거의 흔적은 이름외엔 찾아볼 수 없었고 대동강 맑은 물만 예와 다름없이 흐르고 있었다. 넉넉하고 따뜻한 고향의 정감을 느낄 수 없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찾아간 고향이라 어색해서 그런것은 아니었다.
다시 찾은 평양은 사람도,건물도,분위기도 모두 회색으로 칠해진 「죽은 도시」라는 인상을 떨치기 어려웠다.
마을마다,동네마다 서있는 「무조건 복종」「우리는 행복해요」「우리식대로 살아가자」「위대한 영도자 김일성 수령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는 글귀의 구호판·교시판·유화판·충성탑만 빨간색등 원색을 썼을 뿐 시내 모든 건물은 회색으로 되어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만나는 사람들의 대화주제가 통일·임수경·팀스피리트훈련·이종구 국방장관 발언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활동적이고 꿈틀대는 생명력넘치는 공장노동을 보고 싶었다. 자연스러운 농장노동자의 사적인 얘기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물론 인민궁전의 꼬마들까지 『통일을 위해 좀더 수고하셔야지요』『팀스피리트를 없애고 남조선 콘크리트벽을 허물어 주시라요.』… 등의 단문성 요구외에는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30일 오후 평양시내에서 우연히(연출되지 않은) 만난 고등학생들은 『남조선 소년소녀들이 배가 고파 깡통구걸을 하는게 안타깝습니다』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학생들,그 사실은 어디서 알았지』『신문이요.』
『무슨 신문에서?』
『최근 신문이지요.』….
그날 저녁 북한 최고인민회의 간부들을 옥류관으로 초청해 만찬을 베푼 자리에서 『참으로 통일을 하려면 남이나 북이나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에게 서로의 사정을 제대로 교육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거리에서 만난 학생들의 예를 들어 질문하니 윤기복 조평통 부위원장은 머뭇거리며 답변을 피한다.
나로선 최대의 예의를 갖춰 『수령님은 어떤 기차를 타십니까』라고 묻자 여성안내원은 당황하더니 이내 화를 낸다. 『…어떻게 존칭도 없이 「수령님」이라 그러십니까. 위대하신 영도자라는 말을 붙이셔야지요.』
한 리셉션에서 만난 하이 클래스의 중년여성은 전체 인민들의 「뜨거운 통일열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40년간 위대하신 영도자 김일성 수령님이 꿈에도 그리는 통일을 우리 인민들이 선사해드리지 못해 모두 마음아파하고 있습니다. 이를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이지요.』
금강산에서 평양으로 향한 기차길. 평양 남동쪽 60리 거리인 외가 중화에 이르니 동산과 언덕과 저녁밥짓는 초가는 온데간데 없고 평양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허허들판 평야가 끝없이 깔려 있다. 대규모 경지정리작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돼 불도저로 산지를 깎고 평야를 만들었다는데 우리의 다세대주택 비슷한 6가구용 3층 「신주택」마을이 곳곳에 들어섰다.
한여름 60리길을 걸어 외가에 들어서면 활짝 웃으며 시원한 물을 타주던 외할머니. 소꿉장난 같이하던 외사촌 여동생 화숙이가 생각나 갑자기 눈물이 괴었다.
『이게 아닌데… 내 고향은 이게 아닌데….』
사람들은 그때 사람들과 다를바 없고 머물던 주암초대소의 백김치·녹두빈대떡·쉬임떡은 옛날 맛과 변함이 없건만 왜 이리 마음이 착잡하고 배반당한 느낌일까.
한 사람이 조종하는 거대 공장같은 느낌,훼손되지 않은 환경,찢겨진 노스탤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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