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B 출신 전성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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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EPB(옛 경제기획원) 전성시대'가 재연됐다. 4일 장관 인사에서다. 김영주 산업자원부 장관 후보자나 임상규 국무조정실장 내정자는 모두 옛 기획원 출신이다. 이에 따라 현 정부에서 부처를 맡는 기획원 출신 장관은 권오규 재정경제부 장관을 비롯해 장병완 기획예산처 장관, 김성진 해양수산부 장관 등 4명으로 늘었다. 청와대에서 정책을 지휘하는 변양균 대통령 정책실장도 기획원 출신이다. 기획원 출신 중 특히 '예산통'의 약진이 눈에 띈다.

반면 개발시대에 기획원과 쌍벽을 이뤘던 '모피아'(옛 재무부를 뜻하는 영문 명칭인 MOF와 마피아를 합성한 말로 재무부 관료를 지칭)들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세제 전문가인 이용섭 건설교통부 장관이 재무부 출신이긴 하지만 이른바 모피아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금융 라인은 아니다.

청와대의 김용덕 대통령 경제보좌관은 국제금융 전문가다. 정통 모피아로는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뿐이다. 몇 년 전까지 모피아가 전성시대를 누렸던 것에 비하면 금석지감(今昔之感)이 들 정도다. 외환위기 이후 정책 사령탑을 맡았던 이규성 전 재경부 장관과 구조조정 지휘자인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모피아의 대표적 인물. 이들을 앞세운 모피아들은 다른 경제부처에까지 활발히 진출하기도 했다. 윤진식 전 산자부 장관과 정덕구 전 산자부 장관이 그런 경우다.

그랬던 모피아가 찬밥 신세가 된 것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재무부 출신 전직 고위관료는 "모피아 출신들은 정책의 실용성과 문제점 등을 따지기 때문에 정치권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 재무부 출신 관료는 "지난 정권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입어 온전한 이를 찾기 어렵게 된 것도 이유"라고 말했다.

시장에선 기획원 출신의 약진이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정부의 경제정책에서 '재정'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만큼 예산을 알고 정책의 밑그림을 그려본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각의 '쏠림'현상은 피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정부 안에는 다양한 시각이 필요한데, 수십 년간 한솥밥을 먹던 기획원 출신 선후배끼리 정책 입안과정에서 필수적인 '견제'와 '균형'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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