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기술의 미숙 극복해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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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역사적이고 성공적이어야 할 한소수뇌회담이 끝나자 마자 개운치 않은 뒷말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큰 외교잔치를 치르며 우리정부가 과연 이에 걸맞는 준비와 대응을 했었는지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소리다.
회담일정조정에서 부터 회담결과를 발표한 뒤에 빚어지고 있는 혼란스러움을 보며 우리는 정부의 외교적 역량과 국제정세에 관한 식견에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우리를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번 수뇌회담에서 소련측에 의해 새롭게 제의된 우호협력조약문제다.
이 제의에 대해 처음 우리측은 수락했다고 발표했다가 나중에 이를 수정,발표문에서 삭제를 요청하고 뒤늦게 다른 우방들의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해명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우호협력조약이란 말 대신 선린협력조약으로 바꾸어 교섭하기로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보며 우리는 처음 이 사실을 발표하는 시점까지는 적어도 이 조약의 성격이 무엇인지,국제적으로 어떠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인지 당국자들중 일부는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이 조약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실질적으로 소련과의 동맹,군사협력을 규정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조약은 소련이 남방정책의 일환으로 꾸준히 추진해 오고 있는 아시아집단안보구상의 일환이라는 성격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소련의 이러한 구상은 특히 동북아지역의 이해당사자들인 미국·일본·중국을 비롯,많은 나라들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 주춤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소련은 다국간의 교섭보다는 개별국가 하나하나를 통해 쌍무적인 관계강화를 통한 접근방법으로서 우리에게 그러한 제안을 해온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또 소련은 이미 북한과 군사동맹 성격의 우호협력조약을 맺고 있어 만약 우리와 조약을 체결할 경우 이를 어떻게 조정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미·일·중과의 의견조정문제등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이러한 점들이 고려되었다면 수뇌회담 직후 수정하기는 했지만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키로 했다는 발표는 없었을 것이고 뒤늦게 관계우방들에 궁색한 해명을 서두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결국 우리정책 당국자들의 단견과 충분치 못한 회담준비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적어도 수뇌회담의 경우 제기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검토와 대비는 실무적 차원에서 있어야 했다. 또 외교협상의 기술상 준비되지 않은 의제가 나와 이해하기 어려울 경우는 『나중에 검토해보자』는 정도의 여유와 순발력도 갖추었어야 했다고 우리는 믿는다.
외교는 축적된 국가능력의 총체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국민이나 정부나 우리도 국제사회에서 이제 제 목소리를 내며 살아갈 수 있는 것으로 자신도 하고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이번 우호협력조약문제를 두고 보여준 외교적 미숙성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동북아질서 재편과 관련해 다시 한번 우리의 능력을 점검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요즘 동북아정세는 구한말의 열강의 각축과 흔히 비교되곤 한다. 이럴 때일수록 외형상의 화려함보다는 정확한 정세판단과 외교적 역량을 활용하여 국가이익을 극대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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