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간다〃|「문어발식」지양 알찬 경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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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2세 경영인들은 아무래도 1세의 경영스타일을 답습한다. 특출나게 다른 스타일의 경영을 하는 2세 경영인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박 회장은 특이한 2세 경영인이다.
『아버님(박 명예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많은 일을 벌이는 편이지만 저는 지금 하고있는 일을 다지고 또 다지는 편입니다. 그 때문에 크게 발전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발전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부친과 다른 스타일>
박 회장이 이처럼 부친의 겅영 스타일을 모방하지 않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박 회장은 보통의 재계2세들처럼 상당기간 경영수업을 쌓고 경영에 뛰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사원으로 입사해 생산현장이나 또는 부친의 곁에서 하나하나의 경영노하우를 배우게되면 자연 선대 회장의 스타일을 따라가겠지만 박 회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부사장부터 시작했다.
외대3학년 때 미 조지타운대학으로 유학, 그곳에서 졸업한 후 72년 미국지사에서 1년간 무역실무를 익힌 경험은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대농의 전신인 대한농산 및 미도파백화점 부사장직으로부터 회사일을 시작했다.
그는 l년 뒤인 73년 미도파백화점의 사장이 됐고 2년 뒤에는 미도파회장, 또다시 2년 뒤에는 그룹의 주력기업인 (주)대농의 사장이 됐다.
이처럼 경영대권의 빠른 승계작업은 박 회장으로 하여금 부친의 경영스타일을 모방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으며 박영일식 경영을 곧바로 강요했다.
박 회장이 매사를 다지고 또 다지는 식의 경영을 하게된 데에는 그가 경영초기 겪었던 몇 가지 시련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대한농산 부사장으로 취임하자 국제원면파동이 일어났다. 많은 양의 원면을 선매해 놓았다가 국제원면가가 폭락하면서 엄청난 손해를 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일쇼크가 일어났고, 그 결과대농이 6년간의 은행감리를 받아야하는 쓰라림도 맛보았다.
77년 대농 사장직을 맡게된 박 회장은 경영난 극복의 일환으로 중동건설에 참여했으나 그만 막차를 타고 말아 아무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박 회장 나름대로의 경영기법은 이때 터득된 것이다.
그는 수익성 높은 새로운 사업에 도전함으로써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보다는 불어난 군살부터 빼고 난 뒤 새 사업에 진출하는게 올바른 수순이라고 판단했다.

<88년 금탑산업훈장>
이에 따라 당시 박영일 사장은 82년 대농의 안양·대구공장을 처분하고 중역진을 감원했으며 곧바로 청주공장의 시설을 과감히 교체, 신제품개발에 진력했다. 그 같은 노력은 85년부터 불어닥친 국제경기의 호황, 면방 경기의 회복과 어울리면서 88년에는 2억5천만달러의 수출실직과 함께 금탑산업훈장의 영예까지 그에게 안겨주었다.
좋은 시질 경영에 뛰어든 다른 2세 경영인들과는 달리 박 회장은 불운하게도 경영에 참여하자마자 많은 시련을 겪었으며 그 시련은 결과적으로 박 회장의 경영스타일을 안전제일주의로 만들어 나갔다.
결국 박 회장 스스로가 「다소 덜 능동적인 경영스타일」이라고 자신을 평가하는 것은 스스로 욕심을 억누르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할 줄 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 같은 경영원칙은 미래에 대한 설계에까지도 이어진다.
「그룹」이란 꼬리표를 달고있는 기업이라면 너나할것 없이 모두 첨단산업진출을 모색하고 있지만 대농은 그렇지 않다.
박 회장의 주된 관심은 아직도 섬유다. 다만 면방 중심의 생산구도를 다양화해 종합섬유회사로 발전하겠다는 것이 그의 소박한 포부다.
그러나 그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미래설계는 단순히 소박한 것보다는 치밀하다는 느낌을 준다.
『면방을 통한 섬유기술과 대농유화를 통한 화학분야의 노하우가 연결되면 화학섬유에 대한 진출이 가능해지고 종합섬유회사로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지요. 새로운 분야에 대한 진출은 이처럼 자기가 하고있는 분야와 연결되는 것부터 하나하나 시작하는게 좋습니다』
현재 (주)미도파 내에 있는 건설사업부문은 상계점건설 등 미도파백화점의 다점포화 전략에 따른 건설수요와 연결된 것이며 이미 일산지역 아파트 공사에도 참여하고 있듯이 앞으로도 쇠사슬을 이어나가는 식으로 새로운 분야에 한발한발 내딛는다는게 박 회장의 계획이다.

<영자신문사 등 인수>
이에 따라 현재 코리아헤럴드 및 내외경제신문사의 운영과 연관해 데이터뱅크 사업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컴퓨터 소프트웨어사업도 생각하고 있다.
박 회장의 이 같은 사업경영원칙 때문에 코리아헤럴드 인수 및 내외경제신문사의 복간 등 언론사업 진출에는 관련사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신중론을 개진했었으나 박 명예회장이 평소 그 분야에 뜻을 갖고 있어 언론사업 진출을 결정하게된 것으로 알러졌다.
박 회장의 책상 뒤편에는「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하는 것보다 나으리라」는 성경의 한 구절이 걸려있다.
박 회장은 그 구절을 자신의 좌우명이라고 소개했다.
대농은 노사분규를 앓지 않았다.
박 회장 스스로가 박종근 노총위원장을 배출한 기업의 회장으로서 모범적 노사관계의 확립을 위해 남달리 애쓰기 때문이다.
그는 청주공장내에 상업고등학교를 설립했고 교회도 세웠다.
박 회장 스스로가 영락교회 집사도 맡고있다.
인기탤런트였던 안인숙씨의 남편으로 일반사람들에게 친숙한 박 회장은 이제 탄탄한 대농그룹 2세 경영인으로서 60년대의 도약을 90년대에 되살리기 위한 경영전략을 짜고 있다. <이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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