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단편 릴레이 편지] 서어나무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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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시 창작을 배우고 있는 시각장애 학생들과 광릉수목원에 야외 수업을 갔습니다. 가랑비 속에 안개가 자욱하여 늦가을 운치가 그만인 날이었습니다. 처음엔 소나무가 많았는데 그 뒤에는 참나무가, 이제는 서어나무가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사이좋게 지내는 줄만 알았더니 나무들도 영토 싸움을 치열하게 하고 있었다는 거지요.

소나무는 향일성이라 볕이 없으면 죽게 됩니다. 옮겨 심어서 적응하는데도 까다로운 나무죠. 소나무 밑에는 다른 나무들이 쉽게 자라지 못합니다. 그 밑자리에서 참나무는 이를 악물고 자라나 드디어는 소나무보다 키가 더 커져서는 소나무를 죽게 한답니다. 그렇게 확보한 자리가 영원할 줄 알았는데 응달에서 잘 자라는 특성이 있는 서어나무는 참나무의 밑에서 굳세게 자라나 이제 모든 나무들의 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야, 저기 서어나무다! 자원봉사자 누가 소리를 지르자 다 큰 어른 학생들은 어디 어디 하며 다들 다가가 탄성을 지르며 만져보고 안아보고 난리입니다. 그늘에서 자라났지만 설움과 소외를 견디고 당당하게 나무의 제왕이 된 서어나무가 은근히 자랑스러웠던 것이지요. 햇빛에 대한 그리움이 그늘을 만들고 그늘은 시들지 않는 위대함을 만듭니다.

<전각=정병례, 글="시인" 이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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