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광고공사 사장|「공익자금」주무르는 방송계 "돈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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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방송계에는 커다란 돈줄이 있다.
덩치 큰 방송사가 움직이는데 꼭 필요한 에너지원인 광고수익사업을 거머쥐고 10년 넘게 뒷감당을 해온 한국방송광고공사다.
돈을 다루다보니 자연히 뒷 얘기도 많고 5공이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까닭에 최근 창립 10주년이 지났음에도 존립의 필요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그만큼 광고공사에 쏠리는 시선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에 못지 않은 관심이 광고공사 사장에게 머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좋든 싫든 외부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있는 셈인데 정작 공사 측은 이런 시각 자체를 몹시 언짢아하는 눈치다.
당초 설립취지에 나타나듯 방송제작과 광고영업의 분리를 통한 공익자금 조성으로 전파수익의 사회환원을 꾀한다는 게 뭐가 나쁘냐는 입장이다.

<"수익 사회에 환원">
반면 시대가 바뀐 마당에 빼앗긴 방송사의 권한은 마땅히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방송사들의 볼멘소리도 만만찮다.
그래서 속사정을 갈 모르는 목에선 어느 한편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심정적 공감을 갖고 듣게 마련이어서 명쾌한 판단을 내리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안팎으로 높아만가는 방송민주화의 물결 속에 광고공사가 안고있는 작금의 문제점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탄탄치 못한 위상을 대변하듯 첫 번째로 손꼽히는 어려움은 상충하는 이해집단 사이에 낀 광고공사의 위치다.
방송광고 영업을 하다보면 으레 사고 파는 사람 중간에 서서 양쪽의 입장을 대변하게 돼있지만 방송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방송사의 이익과 방송광고대행사의 이익을 동시에 맞춰준다는 것이 애초에 어려운 일이어서 양쪽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광고공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있는 공익자금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난제임에 틀림없다.
방송광고로 조성된 공익자금의 유용(?) 여부를 둘러싸고 심심찮게 파문을 일으켰던 전력도 없지 않아 광고공사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곤 했다.
방송과 문화예술의 진흥사업을 돕는다는 당초 뜻과 다르거나 때론 도를 지나쳐 국가예산으로 메워야할 사업까지 거드는 결과를 낳기도 해 종종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언론인 연수, 올림픽 기념탑·예술의 전당 건립 등과 함께 드물기는 해도 현대사회연구소·정경연구소 지원과 같은 정치성향의 자금지원 의혹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래도 87년 이후에는 사회민주화 추세로 기존 틀이 바뀌며 본래 의도한 순 기능적 측면이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광고공사가 태어난 것은 81년1월.
국보위 입법회의에서 만든 언론기본법·한국방송공사법·한국방송광고공사법을 토대로 마련된 광고공사 초대사장에는 홍두표 전 TBC(동양방송)사장이 임명됐다.
광고공사 초창기 터잡기를 진두지휘한 홍 사장은 TBC시절 전무에서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지 3개월만인 80년11월 언론통폐합의 쓰라림을 경험했던 방송통이다.
방송 실무에서부터 경영에 이르기까지 방송에서 잔뼈가 굵은 홍씨가 광고공사 사장에 내정된 것은 공사 출범 한달 전쯤.
동경특파원시절 평소 안면 있던 허문도씨가 5공들어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들어선 후 홍씨를 적극 천거했던 것이다.

<허문도씨가 천거>
『지나치리만큼 추진력이 있고 경영에 뛰어난 능력이 있다』며『현대사회에서는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허씨의 추천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주저하지 않고 최종결정을 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문공부장관(현재 공보처장관)이 임명토록 돼있는 광고공사 사장은 실제 내부적으로는 청와대와의 협의를 거치지만 당시 분위기상 허 비서관의 발언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이광표 전 문공부장관은 마음속으로 동아방송국장인 최모씨 등을 꼽고 있었으나 허 비서관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커 그대로 통과됐다는 후문이다.
홍씨의 추진력은 광고공사에서 진가를 발휘, 초반 광고물량을 따내기 위해 사장의 위신도 아랑곳없이 골프 등의 모임을 마련, 실무진에 기회를 제공하는데 힘을 쏟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는 KBS·MBC 양 사에서 오기로 한 영업관련 국장·부장들이 제때 오지 않아 업무에 차질을 빚는 등 초반 고생이 심했다는게 현 간부들의 얘기다.
광고공사를 공익자금 관리 부서쯤으로 여기고 영업은 자신들이 직접 맡겠다는 식의 태도를 취한 양 사 광고영업 고위간부들이 사람을 보내주지 않아「개점휴업」상태였다.
결국 실무 책임자가 직접 방송사 사장과 만나 담판 끝에 인사카드를 들고 오게 만듦으로써 비로소 정상가동에 들어갔을 정도다.
3년 임기를 마치고 연임한 홍 사장은 뛰어난 경영수완으로 빛을 발했으나 다소「정치적」이란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어차피 인물평가는 엇갈린 시각이 있게 마련이고 홍씨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 싶다.
그러나 홍씨가 임기를 마치기전 전매공사 발족을 앞두고 사람을 찾을 때 전 전 대통령이 직접 홍씨를 가리켜『이 사람이면 맡길만하다』며 전매청장을 시켜주어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한 점은 홍씨의 능력을 가늠케 하는 일화로 남아 있다.
2대 사장으로는 앵커 출신이자 당시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있던 하순봉씨가 들어섰다.
비서실장 후임이 정해지며『방송인 출신이라 적격자』라는 평가를 받고 광고공사 사장으로 옮겨왔으나 그다지 활발한 움직임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광고업무가 실무진에서 별무리 없이 움직인 시점이기도 한데다 하씨가 광고업무에 전문가가 아니고 홍씨만큼 추진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는게 주변의 평이다.
13대 국회 출마를 위해 88년 말 진주로 내려가며 공석이 돼 단명한 2대 사장의 후임이 결정되기까지 몇 달간 직무대행 체제가 유지됐다.
여하튼 수개월간의 공백 끝에 3대 사장에는 초창기부터 줄곧 감사를 맡아오던 남웅종씨가 결정됐다.
실무형 사장보다는 정부와의 안면관계로 지정되는 전철을 밟았다는 것이 인사를 둘러싼 외부시각이다.
통역장교를 거쳐 보안사 참모장을 역임한 남씨가 12·12사태 후 군복을 벗고 광고공사에 몸담아오다 사장이 된 것은 최창윤 당시 정무수석(현 공보처장관)과의 군 시절 친분이 작용했다는 얘기다.
엄밀히 따져 광고공사는 사장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공사의 역할 자체에 관심이 쏠려있다.
공사의 기능과 업무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사람도 많지만 반대로 쓸데없는 곳에 지원하는 일부 사항을 개선한다면 공사의 바람직한 방향설정이 가능하다고 보는 이들도 꽤 있다.
87년 모태인 언기법 폐지와 함께 사라졌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공사측은 공사의 위상 자체가 언기법에만 있는 게 아니고 방송공사법과 방송광고공사법 등에 뿌리를 두고 있어 법적 하자가 없다고 반박한다.
5공시절 아무런 움직임 없이 순응하다가 민주화 바람을 타고 방송광고 영업권을 돌려달라는 대도는 어불성설이라는 말도 나온다.

<"법적 하자 없다">
공익자금분야의 시각차이도 크다. 공익자금을 관련·친여 단체 내지 국책사업에 쏟아 붓고 방송제작에 도움을 주는 부분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비난이 적지 않은게 요즘 실상이다.
이에 반해 조목조목 분야별로 이치를 따지는 공사측의 반론도 전혀 억지 소리는 아닌 것 같다.
국가예산이 기간산업 등에 몽땅 투자되고 있어 언제 정신적 문화예술분야에 돈을 쓰겠느냐며 예술의 전당·예술단 공연지원 등에 준 공익자금의 실질적 기여도 같은 것을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더욱이 방송광고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고 대기업과 방송사간의 적정 광고가를 유지하는 한편 시장개방에 대비, 국내 광고대행사의 체질을 키우는데도 일조한 셈이라고 자평한다.
공사내부에서 직접관련이 없는 공익자금관리위원회의 구성에 회의를 품고 있는 것은 눈 여겨 볼만하다.
말썽 많은 공익자금관리를 의한 전담기구로 발족했으나 관리위원 9명이 공보처·방송위·문예진흥원 추천의 3명씩으로 끼여져 구성자체가 이익단체집단의 모양새를 띠고있어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지난 10년간 총4천1백38억원의 공익자금을 조성, 언론공익사업에 1천5백억원, 문화진흥사업에 2천6백38억원을 집행한 자금내용에 일부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저기 벌여놓은 일이 많아 당장 문을 닫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개선책을 모색해 나가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기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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