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5)제85화|나의 친구 김영주(10)-이용상|학병 지원"거짓"혈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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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우리들을 실은 군용 열차는 압록강 철교를 지나 안동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중국·동북3성 즉 만주땅이 시작된다.
새벽부터 「비상」이 걸렸기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던 우리들은 거적을 깔아놓은 화물차에 쓰러진 채 녹아 떨어졌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잠이 오질 않았다. 다시 못 볼 고국과 가지 가지의 상념들로 머리가 오히려 맑아지고 있었다.
만주의 밤 공기는 벌써 영하 2O도.
「노호처럼 몰아치는 삭풍에 잠 못 이루는 밤이여」로 시작되는 『항일 유격대 노래』가 또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그 노래를 정성껏 가르쳐준 조성윤은 나의 중학 동창이었다.
집이 가난했던 그는 중학 4학년때 신경 (장춘) 에 있는 국립 만주 건국 대학에 합격한 수재였는데 나와는 둘도 없는 사이였다. 아직도 내 머리에는 그가 보내온 편지 한 구절이 생생히 살아 있다.
「나는 이제 기도하지 않기로 결심했네. 이 세상에 하느님은 없어. 나는 만주에 온 후 우리 독립군을 만나게 해달라고 그렇게도 열심히 기도 했으며 또 직접 찾아 나서기도 했지만 끝내 독립군을 만나지 못했어.
만일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왜 나의 간절한 기도를 이토록 외면한단 말인가. 그래도 신이 있단 말인가.
이군, 가톨릭 신자인 너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기도도, 하느님도 다 포기했네」이 편지를 읽은 후 나는 어려운 내용이라 회답을 못했다.
그리고 지난 여름 방학 때 조성윤과 함께 공부하러 갔던 금강산 온정리 황룡사로 「민족스님(민족에 대해 우리에게 눈을 뜨게 해주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붙인 이름)」을 찾아가 그의 편지 얘기를 했다.
스님은 『전깃불이 들어오는 곳, 자동차가 다니는 곳에 우리 독립군은 없답니다. 그 학생은 너무 안이하게 독립군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었는지요』라고 했다.
그 누구보다도 만해 한용운 스님을 존경하는 우국 스님은 소시 때는 만주 여러 곳을 유랑했으며 특히 독립군 사정을 환하게 알고있는 분이었다.
그해 9월27일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했다. 이에 흥분한 나는 3국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가 망했으니 다음은 독일, 또 그 다음은 일본 차례가 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이 조선에서 패주할 때 필연코 있을 발악에 대응하기 위해 서울에서 학생 조직을 하려는데 자네 의견은 어떤가』고 조성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그 편지에 『전깃불 있는 곳에는 독립군은 없다』는 민족 스님의 말도 함께 써보냈다.
이 편지는 나의 크나큰 실수였다. 편지가 검열에 걸린 것이다.
당국은 내 편지를 검열한 후 다시 그 편지를 감쪽같이 봉해서 조성윤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후 일본 경찰은 계속 우리들의 편지 왕래를 살폈으나 조성윤의 회답이 없자 그는 문제삼지 않고 나만 경기도 경찰부서에서 체포해 갔다.
나를 담당한 고등계 형사는 마쓰하라(송원)라고 창씨한 평양 사람이었다. 그는 험악한 인상으로 겁을 주면서 『나는 이래봬도 평양 대동강 경찰서에서 특별히 서울로 영전된 민완 형사라는 것을 너는 명심하라』며 얼러댔고 또 자기가 평양 대동강 경찰서에 있을 때 조흠파 형사(작가·전 경기여고 교사)와는 아주 단짝이었기 때문에 문학하는 사람을 잘 이해한다면서 나를 구슬리기도 했다.
결국에 가서는 『민족 스님이 누군지 대라』며 매일 밤 죽도록 고문했다.
그때 나는 고문당하면서도 그들 조선인 형사들에게는 크나큰 걱정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1943년12월)조선 학생들의 학병 지원 성적이 부진하여 자기들이 맡은 책임수량을 채울수 없다는 불안이었다.
나는 12월8일 (대동아 전쟁 발발날) 새벽 학병의 뒤를 따르겠다는 혈서를 썼는데 유치장이 발칵 뒤집혔다. 유치장에서 피를 보는 것은 절대 금물이며 그 책임이 간수에게 있다는 것을 나는 그후에야 알았다.
다음날 고등계 주임 일본인 사토 (주등) 경부가 나를 불러내더니 『네 혈서는 진정인가. 진정으로 학병을 지원하겠는가』고 다짐했다. 그는 이어 『너는 학병에는 연령 미달일 뿐 아니라 학병은 이미 마감됐다. 그러니 내년 5월에 있는 「가미카제 (신풍) 특공대」에 지원하라』는 것이었다.『넷!』
나는 서슴지 않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검찰에 보내는 송청 서류까지 다 꾸며진 나였으니 감옥에 가서 썩는 것보다는 무슨 방법이든 밖에 나가야 겠다는 나의 「혈서작전」이 주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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