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갈라 새판" … 대선 게임 만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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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이 본격적인 대선 게임을 시작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발언 속엔 '노무현식 대선 계산법'이 들어 있다고 본다.

계산법은 두 가지다. 우선 순수 지지층 재결집과 분명한 편가르기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21일 발언은 2002년 대선 유세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노 대통령의 지지자들에겐 충분히 감동적이었을 것이고, 그 점은 성과"라고 말했다.

둘째는 그동안 통합신당 반대에 초점을 맞춰왔던 메시지를 사람 문제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바로 고건 전 총리, 김근태 의장, 정동영 전 의장 등 여권 내 대선 후보들에 대한 언급이다. 고건 전 총리에 대해선 "실패한 인사였다"고 했고, 김근태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의 장관 임명을 놓고는 "링컨 흉내 좀 내려고 해 봤는데 재미가 별로 없다(재미를 못 봤다는 의미).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었다"고 했다.

아무리 노 대통령 특유의 직설적 화법을 감안한다 해도 정치적 의도 없이 여권 대선후보들을 향해 던질 수 없는 얘기라는 게 여당의 시각이다.

노 대통령 발언을 놓고 청와대 관계자는 "솔직한 심경을 밝힌 것 아니냐"고 했다. 대통령의 한 측근은 "고건에 대해선 본심을, 김근태와 정동영에 대해선 변방을 두드렸다고 본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고건 불가' 입장은 수시로 감지돼 왔다. 얼마 전 노 대통령은 한 여권 고위인사를 만나 "다음 대선에서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기는 어렵겠지만, 도저히 국가 운영을 맡겨선 안 될 사람을 안 되게 할 수는 있지 않겠느냐" "여당 후보로 고건씨가 간다면 내가 나서서라도 막겠다"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오랜 참모는 "2003년 초 인수위 시절 고건 총리 카드는 참모들이 반대했지만 노 대통령이 밀어붙인 인사"라며 "노 대통령은 고건씨를 대표적 보수인사로 봤다. '참여정부=진보정권'이란 인식을 희석하기 위한 목적의 기용이었고, 고건 총리도 그런 사실을 잘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고건 총리는 보수와 진보의 가교역할을 해 주기는커녕 복지부동으로 일관했고,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뒤로 빠졌다. 노 대통령은 진저리를 쳤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이 김근태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까지 끌어들인 이유는 뭘까. 열린우리당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이 부분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인사 문제를 얘기하다 자연스럽게 거론한 것일 뿐"이라고 정치적 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친노파들은 조심스럽게 '여권 후보 3불론'을 꺼내고 있다. 고건.김근태.정동영 등 거론되는 여권 후보로는 이명박.박근혜 중 누가 한나라당 후보가 되더라도 본선에서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후보군을 만들어내야 정권 재창출에 도전이라도 해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열린우리당 핵심인사는 "노 대통령은 현 여당 후보군이나 구도로는 내년 대선에서 승리가 어렵다고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친노파들은 노 대통령의 발언이 김근태.정동영과의 결별 수순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고 본다. 두 사람 모두 통합신당론자들이다.

결국 2월 전당대회를 전후해 통합신당파와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내년 말 대통합 구상과도 닿아 있다. 청와대 출신의 한 참모는 "내년 10월이나 11월께 대통합을 통한 막판 역전을 시도하려면 현재의 구도가 하루빨리 깨져야 한다"며 "고건.정동영.김근태가 당내 대권주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여권 내 새로운 후보군을 형성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유기준 대변인은 "범여권의 유력 주자 세 사람을 싸잡아 비난하고 나선 것은 노 대통령이 퇴임 이후를 대비해 '대권 새판짜기'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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