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사진전문기자의네모세상] 속초 해수욕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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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n EOS-1Ds MarkⅡ 70-200mm f5.6 30초 ISO 200

겨울 밤바다를 찾았습니다. 휑한 바다로부터 거침없이 내달려온 바람이 매섭습니다. 두둑하게 차려 입었지만 살 속을 비집는 바람에 온몸이 아립니다.

한 중년 신사가 바다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물거품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의 끝자락에 멈춰섭니다. 바다와 마주한 남자는 돌부처인 양 미동도 없이 얼어붙었습니다. 바람과 파도에 길을 묻는 건가요? 이윽고 중년 부인이 바다로 들어섭니다. 한 발짝에 망설임 한 번, 또 한 걸음에 서성거림 한 차례, 그렇게 더디게 남자의 곁에 다가섰습니다. 그녀도 망부석이 되어 그저 바다만 바라봅니다. 시간에 삶을 묻는 건가요? 돌부처와 망부석이 된 두 사람은 한참 후에야 손을 맞잡습니다. 두 사람은 시나브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또 다른 연인이 들어섭니다. 한 무리 친구들이 그 뒤를 잇습니다. 한겨울에 어느 누가 바다를 찾으랴 생각했지만, 행렬은 순례자처럼 끊임이 없습니다. 오가는 부부며 연인이며 친구들의 흔적은 발자국으로 백사장에 남겨집니다. 밀려드는 파도와 지나는 바람이 그 흔적을 지우고 또 지우지만, 바다로 향하는 모랫벌엔 또 다른 흔적들이 아로새겨집니다.

빛이 부족한 어둠 속에서 30초간 노광을 주면서 밤바다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 시간 동안 오간 파도의 흔적은 흰 안개인 양 기록되고, 사진 속의 사람은 아스라할 만큼 흐려집니다. 다만, 움직이지 않는 백사장의 발자국만 정지된 상태로 찍혀 남습니다. 사진 속 피사체는 비록 모두 정지된 채이지만, 그 장면 속 밀려오고 지나가는 흐름은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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