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드러낸 「노동해방 시인」(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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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전쟁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가운 소주를 붓는다/아/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84년 9월 시집 『노동의 새벽』을 낸뒤 관심과 화제의 대상이 되어왔던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박노해씨(33·본명 박기평)가 마침내 「얼굴」을 드러냈다.
12일 오후6시 안기부에 구속돼 입감절차를 밟으러 승용차편으로 서울 중부경찰서에 도착한 박씨.
깡마른 얼굴과 1m62㎝ 정도의 단신에 밤색 반코트와 검은색 바지차림. 침착하고 여유있는 표정이었다.
양손에 수갑을 차고 수사관 2명에 의해 팔짱을 끼인 부자유스러운 상태로 수사관들에게 양해를 구한뒤 보도진들에게 짤막한 인사를 했다.
『이나라 언론자유와 민주화투쟁을 위해 애쓰는 기자여러분에게 따뜻한 연대의 인사를 드립니다. 나는 남한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중앙위원 박기평입니다. 또한 박노해시인으로도 불리는 사람입니다.』
85년이래 도피생활을 해온 사람답지 않게 자신을 소개하는 목소리는 활기있고 또렷했다.
자신의 불철저성으로 인해 구속돼 비통한 심정이나 「노동해방」과 「민중해방」은 자신 한사람이 구속된다고 해서 중단되진 않을 것이라고 소감을 밝힌 박씨의 발언은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는 수사관들의 제지로 이내 중단됐다. 유치장으로 끌려들어가면서 박씨는 「쟁취하자 노동해방」「노태우정권 타도하자」「사노맹만세」등의 구호를 계속 외쳤다.
수감되는 박씨를 보면서 한 노동자시인이 「혁명적 사회주의 투사」가 되도록 만든 우리사회의 현실을 다시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마음이 무거웠다.<이하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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