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심판 정행덕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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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삐이.』
땀 냄새를 풍기며 뜨겁게 뒤엉킨 선수들의 몸 동작이 일순 정지하는가 싶더니 시선은 모두 한곳을 향한다.
그곳에 선 주인공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두 팔을 들어 양쪽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채 허공을 가리킨다.
「점프 볼」을 선언하는 농구 심판의 멋진 모습이다.
1m78cm의 훤칠한 키에 검정 줄무늬 반 팔 셔츠 밖으로 드러난 두 팔이 유난스레 희다.
정행덕씨는 대통령배 90 농구대잔치에 처음 등장, 3개월의 장기 레이스를 펼치면서 고정 팬을 가질 만큼 눈에 익은 전임 심판 여성 1호다.
그러나 불과 4년 전 만해도 그 이름 석자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땀에 젖은 한국화장품선수의 유니폼 잔 등에 붙어 있었다.
선일국교 5년 때 농구 볼을 잡기 시작, 선일여중→은광여고→한국화장품을 거친 정씨는 선수시절 비록 태극마크를 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소속팀 고정 스타팅 멤버에 드는 괜찮은(?)선수라는 평을 들었었다.
선일 국·중 시절엔 77년부터 80년까지 4년 동안 박찬숙의 동생 인 박찬미(태평양화학)와 함께 무적 팀으로 전승기록을 남기기도 했던 주역.
그러나 정씨는 실업팀에 입단하면서 대부분 선수들이 그렇듯 위장병을 앓아 체력이 달리게 돼 실업 무대에서는 그다지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88 서울 올림픽은 정씨에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한다.
1년 선배인 신기화(국민은)·이형숙(한국 화장품), 동기생인 최경희(삼성생명)·이선미(SKC)등 지금도 코트를 누비고 있는 동료·선배들이 각광을 받는 뒤편에서 고덕 국교 코치로, 그리고 국민학교 경기의 심판을 볼 수 있는 3급 심판으로의 변신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던 중 서울 올림픽에 참가한 홍일점인 주부 국제심판 페리씨(40·미국)의 등장은 정씨의 목표를 또다시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정씨는 농구협회의 기록과 통계 일을 자청했고 89년 2월에는 2급 심판자격증을, 그리고 90년5월엔 마침내 국내최초의 여성1급 심판이 됐다.
정씨는 매우 떨며 며칠밤 잠을 설쳤던 90년 시즌 개막 2일째인 SKC-신용보증기금경기를 시작으로 올 시즌 23게임을 소 화해 냈다.
명실상부한 협회공인 1급 심판의 업무를 훌륭히 수행해 낸 것이다.
정선기(56·개인사업)씨의 2남3녀 중「보지 않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로 아직 미혼. <김인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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