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이후(정치와 돈:4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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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뇌물·공갈혐의 구속에 “누가 깨끗하나” 동정/“윗사람의 큰 돈은 불문” 불만
검찰이 수서사건을 수사하면서 구속한 의원 5명에 적용한 혐의는 모두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의 「뇌물죄」와 형법상의 「공갈죄」였다.
이원배 의원(평민)은 2억3천만원,이태섭·오용운 의원(민자)은 각각 3천만원씩 수뢰,김동주 의원(민자)과 김태식 의원(평민)은 각각 3천만원씩 수뢰와 공갈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검찰은 이들에게 정치자금법 위반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정치자금법은 ▲후원회의 후원금 ▲선관위 기탁금 ▲당비기부등의 법규정에 없는 정치자금 수수에 대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5백만원 미만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처벌조항을 두고 있다.
그러나 검찰이 이들을 뇌물·공갈혐의로 「단죄」한 것과는 달리 정가에서는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는 동정론이 파다하다.
최소 월 1천만원에서 수억원이 드는 의원들의 정치활동비를 자기 생돈으로 마련해 쓰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은 기업인들에게 돈을 받아쓰는 일에 기본적으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때문에 의원들은 검찰수사가 평의원에게만 미치고 노태우 대통령,김영삼 민자당대표,김대중 평민당총재는 문제삼지 않는데 대해 『크게 받으면 정치자금이고 적게 받으면 뇌물이냐』며 자조하고 있다.
검찰이 의원들에게 뇌물·공갈혐의를 건 것은 정치자금법 위반을 적용할 경우 ▲어느 국회의원도 이를 피해 갈 수 없다는 형평성문제가 제기될 것이 뻔한데다 특히 ▲각 정파 보스를 통해 유입되고 흘러나가는 「당비」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원 세비가 연 6천여만원(미국의원의 경우 약 50만달러)에 불과한 상황에서 매우 엄격한(특히 야당에 불리한) 현행 정치자금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게 중론이며 그래서 차제에 정치자금법을 현실화는게 필요하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최근 사석에서 『가정을 하나하자. 설령 내가 한보의 부정한 돈이 평민당에 유입됐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랫사람들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겠느냐』『만일 권노갑 의원등 내 주변사람이 정치자금문제에서 고문까지 이겨가며 총재와의 관련부분을 차단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동교동은 없었을 것』이라고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노대통령에 대해 「유감의 감정」을 여과없이 노골적으로 표출했는데 『한보가 이원배 의원을 통해 정치자금 2억원을 평민당에 제공한 사실을 검찰이 공개한 것에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 측근이 귀띔했다.
평민당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이 사실이 흘러나올 것에 대비,권의원이 해명서를 만들어 당일 즉각 대응함으로써 파문확산에 제동을 걸었다.
그후 「2억원」중 1억원이 김총재에게 들어갔다는 검찰제공 보도가 있었으나 평민당은 일축했다.
이의원의 「양심선언」과 권의원의 「해명서」,권의원이 검찰조사 다음날인 18일 의원총회에서 밝힌 결백발언을 살펴보면 우리 정치사상 공개적으로는 최초로 한 정당에 정치자금이 유입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어 흥미롭다.
여러 상황을 종합하면 김대중 총재의 정치자금은 권의원이 포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권의원은 「2억원」수준의 정치자금 정도는 김총재에게 따로 보고하지 않고 자신의 전결사항으로 유입과 용처를 결정한다. 그래서 지난해 12월15일 이의원이 『김총재를 존경하는 정태수라는 기업인이 연말경비로 보태쓰라』며 「깨끗한 돈」임을 강조하고 1백만원짜리 수표 2백장을 주자 별로 뒷일을 걱정하지 않고 수표를 송년만찬회 때 「김대중 격려금」으로 포장해 지급했다.
이는 평민당의 자금규모가 커졌다는 단적인 반증이다. 김총재는 평소 뒤탈을 걱정해 정치자금을 수표로 받으면 반드시 은행에 넣어 몇번씩 돌린 뒤 증거를 남기지 않고 사용해왔다. 이제 적어도 2억원 정도는 겁없이 쓸 수 있다는 자신이 붙었다는 얘기다.
권의원은 정회장에게 의원을 통해 2억원을 분명히 받았다는 사실을 「영수」하기 위해 정·이 사이에 사전 약속된대로 『선물 두개 잘 받았다』는 암호전화를 하려 했으나 정회장이 부재중이어서 통화는 하지 못했다.
권의원은 의총에서 『정치자금 염출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다. 앞으로는 더욱 애로가 많을 것이다. 나의 경위해명은 전적으로 사실이니 믿고 위축될 필요없다』고 강조했다.
이번 수사결과를 검토해 보면 보통 한 실력있는 대기업인이 정치인을 상대로 지급하는 일상적 정치자금 규모는 보통 2천만∼3천만원선으로 추정된다.
교분을 가지고 정기제공하는 경우는 추석과 연말 등 절기마다 지급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게다가 이번 사건같이 「건이 물려 있는」경우는 1억∼2억원이 추가로 지급된다.
이의원은 2년간 정회장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으면서 『아무 부탁이나 청탁은 없을테니 염려말고 받으시라』고 정회장이 안심시켰지만 본인은 『평민당이 국회에서 으레 재벌들의 비리를 많이 들추니까 자기회사는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것이겠지』하는 생각으로 부담없이 받았다고 했다.
장기손해보험을 붓는 것으로 생각한 정회장과 「별 문제없이 고맙게 받아썼던」 이의원의 우정어린(?) 정치자금 수수관계는 구체적 이권제공 사실이 폭로되면서 모두 쓸데 없는 소리임이 확실해졌다.<전영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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