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조건부 철군안 왜 냈나(걸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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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상 공격시기 연기 “시간벌기”/새조건 추가로 진의엔 의문/군 궤멸 우려한 내부불만 무마용 추측도
이라크가 15일 쿠웨이트에서의 조건부 철수를 전격 제안,미국이 이에 대해 거부의사를 분명히 밝힘에 따라 걸프전은 새로운 변수를 맞게 됐다.
이라크의 철수안은 많은 전제조건이 딸린 「조건부」이긴 하지만 지난해 8월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사태가 발발한 이래 6개월여만에 처음으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라크가 다국적군의 대규모 지상공격작전이 임박한 시점에 이같은 제안을 한 것은 대략 몇가지로 나누어 분석해 볼 수 있다.
우선 이번 제안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실제로 쿠웨이트 철수의사를 표명했다기 보다는 다국적군 진영의 분열등 복합적인 효과를 노리는 고도의 연막전술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있다.
이라크는 집권 혁명평의회의 성명을 통해 이라크의 즉각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철수를 요구한 유엔안보리 결의안 660호를 수용할 의사를 천명하면서도 이와는 양립 불가능한 이스라엘의 아랍점령지 철수 및 시리아의 레바논 철수 등을 연계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국적군을 주도하고 있는 미·영 등이 그간 줄곧 거부해온 이스라엘 아랍점령지 철수에다 또하나의 새로운 제안까지 덧붙였다는 것은 이라크의 철수의사에 의문을 갖게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이라크가 조건부 철군제안을 들고나오자 미국이 이를 전면 거부한 반면 소련과 이란은 환영의 뜻을 표명하고 나선 것에서도 이라크가 얻고 있는 심리적 효과를 점칠 수 있다.
또한 이라크는 최근 다국적군의 바그다드시 방공호에 대한 미사일 공격으로 최소한 2백88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시기를 선택한 것도 이라크의 이번 제안이 평화해결을 원한다는데에 의문을 제기하는 또다른 이유가 되고 있다.
방공호의 민간인 사상자 발생직후 일부 아랍국가들에서는 대규모 반미 시위가 잇따라 일어나고 있으며 이라크는 이번 제안으로 아랍인들의 이러한 감정을 더욱 부추김으로써 보다 광범위한 아랍인들의 지지를 얻어낼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는 분석이다.
특히 다국적군의 대 이라크 공격목표가 이라크의 쿠웨이트 철수를 넘어서서 이라크군의 전력을 철저히 분쇄,이라크 자체를 궤멸상태로 몰고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라크는 따라서 이번 제안을 통해 다국적군의 맹폭을 완화시키고 더 나아가 지상공격시기를 좀더 연기시킴으로써 한숨 돌릴 수 있는 겨를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미국측의 이같은 분석에는 이란·이라크전때 이라크가 이와 유사한 전술을 구사한 경험이 깔려 있다.
지난 75년 이라크는 이란과의 국경지역 수로문제에 대해 합의에 도달했으면서도 80년 일방적으로 그 합의를 깨뜨리고 이란을 침공함으로써 이후 8년간이나 전쟁이 지속된 사례가 있는 것이다.
한편 미국의 일부 군사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후세인의 휘하 군장성들 사이에 불만이 크게 고조되고 있으며 그것이 이번 이라크의 조건부 철수제안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이같은 분석과 함께 이라크는 전력의 상당부분을 손실했기 때문에 이라크군의 완전궤멸이 가져올 전후 이라크의 무력화에 대한 고려때문에 이번 제안을 통해 잔여전력 온존을 기대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라크의 조건부 철수 제안에 대해 미국이 완전철수를 요구,이를 거부함에 따라 이 제안을 놓고 미·이라크가 협상에 들어갈 여지는 현재로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소·이란·비동맹국가들에서 중재움직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라크가 조건부철수 제안에 이어 이를 구체화할 어떤 행동을 과연 보일 것인지,그리고 그것이 걸프전의 향방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주목된다.<박영수기자>
◎미국이 분석한 이라크의 속셈/다국적군 분열 노린 연막전술/전후 「아랍대부」 이미지 겨냥/아지즈 방소 앞두고 “소에 대한 성의” 분석
미국은 이라크의 급작스런 쿠웨이트 철수제안을 단기적으로 반이라크 연합세력을 약화시키고 장기적으로 전후 아랍질서에 대비한 다목적용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라크의 이같은 의도는 이 제의가 이라크의 무조건 철수를 요구한 유엔안보리 결의안 660호를 수용하면서도 미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여러 조건들을 요구하고 있는데서 나타나고 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철수와 다른 문제,특히 이스라엘 점령지 문제의 「연계해결」은 미국이 그동안 극력 반대해온 것으로 이라크는 이 제안이 미국에 의해 거부될 것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더구나 이라크는 이번에 종전의 요구조건외에 이스라엘 무기철수와 시리아의 레바논 개입중단이란 새로운 두 조건을 추가했다.
미국이 거부할 것이 분명한 이 제안을 이라크가 들고 나온 동기로는 우선 연합국의 분열이 지적되고 있다.
주디키퍼 미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은 이라크가 소련등의 휴전움직임에 반응을 보임으로써 연합세력을 분열,미국을 어려운 입장에 빠뜨릴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소련은 그동안 유엔결의안을 지지하면서도 다국적군의 이라크 공격이 유엔결의안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이라크 파괴와 민간인 희생자를 내고 있다고 불평해왔다.
특히 소련 군부는 특수관계를 가져온 이라크가 다국적군 공격을 받은 것에 불만을 갖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압력을 넣고 있으며 최근에도 프리마코프 특사가 바그다드를 방문하는등 중재노력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CNN바그다드 특파원 피터 아네트기자는 이라크가 프리마코프 특사로부터 쿠웨이트 철수를 발표하라는 엄청난 압력을 받았다며 이번 제의가 이같은 압력에 대한 반응일 가능성이 크다고 16일 보도했다.
파우아드 아자이 중동문제 전문가는 이라크의 이번 제의가 유엔 최종철수시한 직전 프랑스가 제안했던 휴전안 즉,이라크가 철수를 발표하면 모든 중동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내용과 유사한데 주목했다.
이는 프랑스도 이라크제안에 상당히 긍정적 평가를 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라크의 이번 제안은 소련과 프랑스를 만족시켜 휴전논의를 활성화시키고 연합세력을 분열시키려는 의도로 미국은 분석하고 있다.
특히 이라크의 제안이 미 공군의 공습으로 이라크 민간인 수백명이 사망,미국에 비판적 여론이 일고 있고 아지즈 외무장관의 소련 방문을 앞두고 나온데 일부 전문가들은 주목한다.
소련은 훨씬 전부터 이라크의 민간인 피해에 관심을 표명해왔다.
이라크는 또 이번 제안에서 이스라엘 점령지 문제를 연계시킴으로써 아랍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확산시키고 아랍의 단결과 전후 아랍의 세력균형에서 입지를 노린 것으로 미측은 분석하고 있다.
팔레스타인등 이스라엘 점령지문제는 아랍인들에겐 거부될 수 없는 명제로 이 문제의 제기는 이집트·사우디 등 미측에 가담한 아랍국가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면서 전쟁에 질 후세인 자신을 전후아랍의 대부로 만들 수 있다는 계산으로 미국은 풀이한다.
미국의 중동문제 전문가 윌리엄 퀀트씨는 이와 관련,후세인이 이 제안으로 생존과 지도력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고 보았다.
시리아의 레바논 개입 중단을 들고나온 것이 전후 아랍세계 지도력까지 고려한 것이란 분석이다.
이번 철수제안이 후세인 대통령이름이 아닌 이라크 혁명지도평의회 이름으로 나온점과 그 시기로 보아 쿠웨이트 철수를 위한 대국민 설득용이라는 일부 분석도 있다.
쿠웨이트를 어차피 연합군에 빼앗겨야 한다면 자진 철수를 해 스스로의 군사력은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함으로써 이라크 지도부는 엄청난 민간인 피해를 계기로 후세인의 지도력을 손상치 않으며 이같은 피해보다는 쿠웨이트 포기가 낫다는 설득을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의 이번 제안의 뒤에 어떤 뜻이 숨어있는지 계속 분석하고 있지만 이라크가 처음으로 쿠웨이트 철수용의를 밝혔다는 점에서 걸프전은 새로운 정치적 차원이 열릴 수도 있다는 것이 미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같은 의견은 이라크의 제안직후 미 텔리비전 대담에 나온 헤이그 전 미 국무장관이 미국이 다른 문제들을 연계시킨 이 제안을 거부해야 되지만 『이 제안을 잘 들어보고 외교적·군사적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데서 대변되고 있다.<뉴욕=박준영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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