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포로 학대 깊은 유감 가장 좋은 날은 퇴임 다음 날 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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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럼즈펠드(74.사진) 국방장관이 17일 퇴임한다. 미국 역사상 최장수 국방장관 기록을 가진 로버트 맥나마라(1961년 1월~68년 2월)의 재임기간 2596일에 11일 모자란다. 럼즈펠드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 시절인 75년 11월 43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방장관이 됐다. 이후 77년 1월까지 재직한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2001년 1월 다시 국방장관 자리를 차지했다.

이라크전을 기획하고 주도한 럼즈펠드는 9일 예고도 없이 이라크를 찾았다. "미군들의 노고를 격려하기 위한 방문"이라는 게 미 국방부 대변인의 설명이다. 그가 이라크를 방문한 것은 13번째다. 그는 자신의 경질이 발표되기 이틀 전인 지난달 6일 이라크 사태와 관련, "대대적인 조정이 필요한 때"라는 비밀메모를 부시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라크 정책의 실패를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 "의회가 조급하다"=공개석상에서 럼즈펠드는 여전히 뻣뻣했다. 8일 국방부 강당에서 열린 타운 홀 회의에서 그는 "미국과 (민주당이 지배하게 된) 의회에는 조급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인내심이 있다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성공할 기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훈계 조로 말했다. "성급하게 철군을 해서 두 나라에 불안을 조성한다면 그건 엄청난 실수를 하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

최근 부시 대통령에게 이라크 정책의 대폭 수정을 건의한 이라크 연구그룹 보고서에 대해선 "이미 피터 페이스 합참의장 등이 모든 정책 대안을 검토한 바 있다"며 "독창적인 게 아니다"라고 평가절하했다.

◆ "포로 학대 사건이 제일 유감"='가장 나쁜 날과 좋은 날이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럼즈펠드는 2004년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드러난 포로 학대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 일을 접하고 깊은 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당시 전 세계의 비난에 직면하자 럼즈펠드는 두 차례에 걸쳐 사의를 밝혔으나 부시 대통령은 수용하지 않았다. 럼즈펠드는 "가장 좋은 날은 아마 (물러난 다음 날인) 일주일 뒤의 월요일(18일)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올 8월 알래스카에 사는 한 여성에게서 녹색 팔찌를 받은 일화를 소개하면서 잠시 목이 메었다. 당시 그가 이라크 파병 임무를 마친 육군 172 스트라이커 여단에 4개월의 연장근무를 지시했을 때 이 여성은 "병사들의 희생을 잊지 말라"며 팔찌를 줬다고 한다. 럼즈펠드는 "그때 그 여성에게 172여단 병사들이 돌아올 때까지 팔찌를 끼겠다고 약속했다"며 손목에 찬 팔찌를 드러내 보였다.

◆ "북한엔 빛이 없다"=부시 대통령의 정책인 '민주주의 확산'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럼즈펠드는 늘 책상 위에 놓아둔 한반도의 야간 위성사진 얘기를 또 꺼냈다. "사진을 보면 북한엔 평양을 빼고는 도대체 빛이 없다. 반면 휴전선 남쪽은 전기와 에너지, 기회와 성공의 나라다. 자유로운 정치.경제 체제를 가진 남한은 세계 10~12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북한의 통제경제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한편 워싱턴 연방법원은 이라크.아프가니스탄 포로 수용소의 인권 침해와 관련해 민권연맹 등이 럼즈펠드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심리를 시작했다. 럼즈펠드는 8일 면책특권이 있다며 소송 기각 신청을 냈으나 법원이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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