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나라 의원들은 박쥐형·햄릿형·문어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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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나라당 의원들 사이에 오가는 유행어다.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국면이 가까워 오면서 '빅3' 중 어느 쪽을 지지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는 의원들의 행태를 빗댄 말이다.

당내에선 유력 후보로 꼽히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 사이를 오가며 저울질하는 의원은 '박쥐', 이 전 시장과 손학규 전 경기지사 사이에서 고민하는 의원은 '햄릿'으로 불린다. 이도저도 아니고 세 사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 '문어'라는 우스개까지 나오고 있다. 의원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데는 18대 총선(2008년 4월)과도 연관이 있다. 내년 대선(12월 19일)을 치른 뒤 불과 4개월 후에 총선이 치러지기 때문이다. 자칫 지는 후보 쪽에 섰다가 자신의 공천마저 불투명해지는 최악의 상황을 걱정하는 것이다.

다음 총선에서의 재공천과 재당선이 지상과제인 의원들로선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벌이는 도박인 셈이다.

◆ 박쥐.스파이형=대표적 '친박(親박근혜)'으로 분류돼 온 한 중진의원은 얼마 전부터 박 전 대표의 행사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주변에선 "이 전 시장에게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그쪽에 있다'고 충성 맹세를 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 전 시장의 지지율 1위 행진이 길어지자 '줄 세탁'을 하려는 의원들이 나오고 있다. 주로 영남 지역에서 들리는 얘기다. 박 전 대표에 대한 선호가 높은 영남 출신이라 그간 '친박'으로 활동해 왔지만 최근 여론조사 추이를 보면서 생각이 복잡해진 것이다. 지난 총선 때 박 전 대표에게 '정치적 빚'을 진 것으로 알려진 PK(부산.경남)의 한 다선의원도 비슷하다. 최근 그는 이 전 시장을 편드는 발언을 하고 다녀 눈총을 받고 있다. 눈치보기가 극심해지면서 양 캠프를 오가며 다른 쪽의 전략을 흘려주는 의원들도 생겨나고 있다. 이런 행동때문에 영남의 한 초선의원은 최근 두 캠프 모두에서 '스파이'로 찍혔다. 심지어 한 주자 행사에 수행하기 전에 다른 주자에게 전화를 걸어 "가도 될까요"라고 허락을 받는 의원도 있다고 한다.

◆ 안절부절형=PK 출신의 초선의원은 그간 대선 주자들의 행사에 일절 참석하지 않아 왔다. 자신의 지역구에 주자들이 내려와도 "국회 일정 때문에 내려갈 수가 없다"고 둘러댔다. 성급히 줄을 서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아직은 이런 의원이 대다수다. 모든 주자의 행사에 불참해 중립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 후보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겉모습과 달리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는 게 주변의 얘기다. 어느 쪽으로든 너무 늦게 합류해 '공'을 세울 기회를 놓치면 나중에 받을 '상'도 보잘것없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주자를 선택하는 게 좋을지 정보를 수집하라"며 보좌진을 들볶는 의원들도 적지 않다. 한 보좌관은 "의원이 주자들의 동향은 물론 인근 지역구 의원들의 움직임까지 파악해 보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 커밍아웃형=당내의 한 의원 모임을 둘러싸고 최근 "조만간 대표만 남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경선 중립을 강조한 회원들이 하나 둘 유력 후보 캠프에 관여하기 시작해 이런 추세로 가다가는 대표 혼자 남아 모임을 지키게 될 것이란 얘기다. 당내에선 이런 부류를 '커밍아웃(스스로 정체성을 밝히는 것)족'이라 부른다.

이 모임 소속인 한 의원은 "당초 이 전 시장-박 전 대표 위주의 경선 과열을 막기 위해 중립을 외친 측면이 있다"며 "하지만 조기 과열 분위기 속에 더 늦기 전에 지지할 만한 후보가 누구인지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전 시장 쪽에서 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진수희 의원은 "무조건 중립을 지키는 것이 당과 나라를 위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이념과 맞는 주자가 올바른 정책을 내놓을 수 있도록 돕는 것까지 '줄 서기'로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 집단 버티기형=PK지역 의원 3~4명은 5.31 지방선거 과정에서 박 전 대표와 사이가 틀어졌다. 공천과 관련된 잡음 탓이었다. 그래서 머지않아 이 전 시장 편에 설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지만 이들은 입장 표명을 미루고 있다. 오히려 행동을 같이하며 '버티기'를 하고 있다. 주변에선 "함께 움직여 몸값을 높이겠다는 계산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최근 중립을 표방하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의원 모임들도 이런 경우가 많다. 지난달 "당내 대선 후보 선출 과정에서 중립을 지켜 당의 분열을 막겠다"며 출범한 '희망모임'에는 현역의원 31명이 가입했다. 맹형규.권영세.임태희 의원 등 재선 이상 수도권 의원들도 조만간 경선 중립을 선언하고 공정 경선 관리 역할을 자임하는 모임을 만들 것으로 알려졌다.

당 주변에선 "이런 모임들이 생기는 것 자체가 한나라당 의원들이 겪는 '선택 스트레스'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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