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전 길어지면 전재산 날릴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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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인생류전-.
누구나 굴곡이나 사연이 있게 마련이지만 삶의 절반을 이국을 떠돌면서 살아온 쿠웨이트 교민회장 장정기씨(48)는 요즘 이말을 새삼 곱씹고 있다.
지닌해 8월 발생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24년간 월남·싱가포르·그리스·쿠웨이트등 낯선 방에서 악단원·행상·사업 등으로 일궈온 장씨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 월남전땐 위문단 >
젊음 하나에 의지해 개미처럼 일하며 모은 피와 땀들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린 지금 장씨는 이미 반백이 되어버린 머리와 지천명의 나이를 생각하며 허무한 세월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마른 하늘에 날버락이었지요. 몸이라도 성하게 빠져 나왔다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길뿐입니다.』
장씨는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쳐지는 듯 눈을 찡그리고는 『이렇게 주저앉아 삶을 마감할수는 없지 않느냐』며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역마살이 끼었던지 장씨의 외국생활은 어려서부터 유난했던 외국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비롯됐다.
재즈 등 현대음악에 빠져 경희대 음대 2년을 중퇴한 64년 그가 해병대 연예대에 지원, 66년 제대와 동시에 월남에서 미군상대 위문공연 업체인 한국흥행(주)에 취직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제대가 얼마남지 않아 월남파병 대상에서 제외돼 안타까워했던 그는 이렇게 해 어릴적 꿈을 이루게 됐고 67년부터 4년동안 전쟁터에서 맘껏 기타 멜러디를 울렸다.

< 78년 쿠웨이트로 >
월남체류 중 고국을 전혀 찾지 않았던 장씨는 기년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했으나 싱가포르의 한 호텔에서 전용 악단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그곳으로 달려가 이번에는 싱가포르 생활이 시작됐다.
2년이 흘렀을 즈음 어느날 갑자기 그에게 음악에 대한 회의가 강렬하게 일었다.
일종의 권태기에 처해 뭔가 활력을 찾고자 하는 그에게 한 친척은 『그리스가 살기 좋을뿐더러 낭만도 만끽할 수 있다』는 솔깃한 말을 들려줬다.
거의 맨손이었던 장씨부부는 다시 그리스에서 2년동안 출항을 앞둔 배들을 항구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살·고기·야채 등 선식주문을 받으러 다녔다.
고생고생 끝에 겨우 조그마한 한식점을 차렸으나 75년 유류파동으로 3년간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다 다시 활로를 다른 나라에서 찾아야했다.
중동지역의 건설붐이 절정에 달할 무렵인 78년 장씨는 국내건설 회사의 간부로 쿠웨이트에 와있던 대학선배로부터 『감사할게 많다』는 권유를 받고 새 출발을 결심했던 것.
한국 건설업체들을 상대로 식료품·생필품 공급주문을 따내는 일을 시작했다.
2년간 고생한 보람이 있어 이들은 귀국하는 한국인 근로자들을 상대로한 조그마한 선물가게를 쿠웨이트시에 차릴 수 있었다.
때마침 이웃나라인 이라크에도 건설붐이 일어 한국인 근로자들의 선물수요가 급증했다.
1백50km 떨어진 국경지대 압달리 사막에까지 카메라·라디오 등을 승용차에 싣고 행상을 다니기 일쑤였다.

< 호텔서 한국식당 >
행상에서 재미를 본 장씨부부는 81년 국경과 공항의 중간지점인 사막 한가운데에 선물가게를 정한 휴게소를 차렸다.
타국을 떠돌기 거의 15년만에 자리를 잡게된 장씨는 83년 3억6천여만원을 투자해 쿠웨이트 시내의 일급호텔인 메르디안 호텔에 80평 규모의 식당「한국정」을 열었다.
87년엔 호텔앞 아파트 단지내에 국산 아동복을 수입해 파는 옷가게도 개점하는 등 사업을 확장했다.
90년 3월 교민회장으로 선출돼 시야가 넓어진데다 순탄한 사업으로 『이제 어떤 난관이 닥쳐도 끄떡없다』고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때 들이닥친 이라크의 침공은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하루아침에 살벌하게 변해버린 세상에시 교민회장으로서 최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은 교민의 안전이었다.
장씨는 구웨이트를 탈출하기까지 보름동안 우왕좌왕하는 3백40여명의 교민들을 다독거리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 조국은 낯설기만 >
살아돌아온 것만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겼던 장씨는 요즘 세가지 고민거리에 밤잠을 설치고있다.
첫째는 걸프전쟁의 장기전 조짐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걱정이다.
교민들이 다 그렇지만 쿠웨이트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자신이 일궜던 생활 터전을 확인하지 않고는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교민들에 대한 뾰족한 생계대책이 마련되지 않고 있는 것도 걱정이다.
보사부가 교민들을 수재민과 동격으로 취급해 3개월동안 매일 1천3백원의 생계 보조비를 지급해주던 것도 이미 끝난지 오래.
그러나 가장 큰 걱정은 조국이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져 선뜻 이곳에서 새출발 하기가 망설여지는 점이다.
공중전화부스에서 사소한 시비끝에 살인을 저지르는 등 깜짝 놀랄 강력 사건에다 교수들의 대입 부정 등 사회 부조리에 접할라치면 섬뜩함과 겁이 앞서 도무지 자신감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대로 무너지기에는 그동안의 고생이 너무도 억울합니다.』
어금니를 무는 장씨의 굳은 표정을 보면서 그가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웃으며 얘기할 날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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