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외교의 미숙성 반성해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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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국측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것으로 끝난 제9차 한미 경제협의회는 통상문제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에 몇가지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우선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국제사회에서 신용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번 회의에서 미국측은 한국이 자동차등의 시장개방과 우루과이라운드협상에서의 대미 협조를 약속해 놓고도 실제로는 이같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측을 몰아붙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미국측 주장중에는 물론 과소비 자제운동을 정부주도의 수입규제 조치로 인식하는 등 오해에서 비롯된 대목들도 없지 않았으나 우리측이 계속 수세에 몰린 것으로 미루어 책을 잡힐 일도 없지 않았던 듯이 보인다.
이같은 사태를 빚은데는 물론 그만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개별적 사안에 대한 구구한 얘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대미 협상 테이블에서 미국측의 위협조의 강경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사안에 대해 국내에서 반발이 거세지면 정부의 자세가 흔들릴 수 있음은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사태는 밖으로 교섭상대방이나 안으로 국민 어느 쪽도 설득할 능력이나 지도력을 갖추지 못한 정부의 무능력을 탓할 수 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번 한미 경제협의회에서 드러내 보인 것과 같은 불신과 수모를 반복해서 당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도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
신용이란 개인과 개인,정부와 국민간에는 물론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대화와 교류,그리고 관계정립의 기초가 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외교를 마치 몇몇 관료들의 전유물인양 생각하는 식의 오만한 자세를 버리고 널리 사실을 알려 국민의 지혜와 합의를 모으는 겸허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번과 같은 망신을 당한 것도 따지고 보면 몇몇 정부관료들의 정보독점과 외교·내정사이에서 보인 우유부단성·밀실외교가 빚은 결과라는 점을 관계자들은 깊이 깨달아야 한다.
또 한가지 온 국민이 함께 생각해야 할 일은 근검절약·과소비 자제와 같은 국민운동을 전개하더라도 남에게 책잡힐 일은 스스로 경계해야 하겠다는 점이다.
이번 경제협의회뿐 아니라 이미 지난해 중반부터 미국측은 우리의 민간 소비절약운동에 대해 기회있을 때마다 시비를 걸어왔다.
과소비 추방운동이 도덕적 차원에서나 우리 경제가 처한 현실에 비추어 절실한 일이고 아무도 이같은 자구노력에 이의를 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사태를 빚고 있는 것은 남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에게 허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심전심으로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는다면 아무도 우리에게 시비를 걸지 못하리라는 것은 이웃 일본의 대응자세에서 익히 보아온 예다.
동시에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통상문제에 감정을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국가와 국가,국민과 국민간의 이해가 충돌하는 냉엄한 국제경쟁사회에서 감정의 표출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폭넓은 정보와 철저한 논리,세련된 협상기술로 무장할 때에만 국제사회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인식을 통상관계자는 물론,온 국민이 공유해야 할 때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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