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군 부모의 양아들된 박종운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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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종철이 못다한 효도 제가 대신…”/박군 선배… 연행계기돼 죄책감/수배 풀린후 기념사업일 맡아/“민주화운동으로 보답”
『아버님,종철이가 못다한 효도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종운아,난 너를 볼때마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것들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단다.』
고 박종철군 4주기를 맞아 13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내 박군의 묘를 찾은 아버지 박정기씨(60)는 민주화의 제단에 바쳐진 종철군대신 양아들로 맞이한 박종운씨(31)의 두손을 힘껏 잡았다.
박종운씨는 87년 경찰이 종철군을 연행했던 직접 계기가 되었던 종철군의 학교선배. 박군은 『선배 종운의 소재를 대라』는 경찰의 심문에 끝내 침묵을 지키다 고문끝에 숨지고 말았다.
종운씨가 박군의 부모를 처음 만난 것은 박군사건후 거의 2년이 지난 88년 12월이었다.
박군사건이 터진 뒤에도 계속 도피생활을 해왔던 종운씨는 그해 12월 수배 해제조치가 있고서야 박군의 부모앞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저때문에 종철이가 죽게돼서 죄송합니다.』
박군의 죽음이 자신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사로 잡혀왔던 종운씨는 『이미 이렇게 된일인데 종철이 대신 민주화운동에 더욱 힘써달라』는 아버지 박씨의 따뜻한 격려에 다시금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종운씨는 다음해 2월 「민주열사 박종철기념사업회」가 결성되자 간사직을 맡아 헌신적으로 실무를 도맡는 한편 박군의 부모에게도 아들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안부전화를 거르지 않는 한편 명절때는 빠짐없이 작은 선물을 장만,박군의 부모가 사는 염리동 진주아파트를 찾곤 했다.
특히 지난해 12월9일 노동현장에서 함께 민주화운동을 해온 동갑 강희경씨와 결혼을 한 종운씨는 결혼전 강씨와 함께 박군의 부모를 찾아뵙고 결혼승낙을 받기도 했다.
마포 서울대 동창회관에서 가진 결혼식에서 박군 부모에게 폐백을 드리고 「가족」 사진을 함께 찍는 등 「부모」에 대한 예를 다했다.
월남실향민인 종운씨의 장인·장모는 결혼식날 낯선 사람들이 폐백을 받는 데 의아해하다 박군의 부모인 것을 알고서야 종운씨가 어떤 「인물」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인 강씨 또한 결혼뒤 남영동의 허름한 건물4층의 3평짜리 박군기념사업회사무실에서 남편 종운씨의 실무를 돕고 있다.
종운씨의 박군에 대한 기억은 『정이 많고 상냥한 후배』라는 것.
서울대 사회학과 81학번인 종운씨는 학교 3년후배인 박군이 84년말 자신이 가입돼 있던 「대학문화연구회」라는 지하서클에 들어오면서 알게되었다.
그뒤 세차례쯤 만나 토론을 나누었던 두사람은 종운씨가 86년 4월 신길동 가두시위의 배후로 수배돼 도피하면서 왕래가 끊어졌다.
종운씨가 박군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숨지기 6일전인 87년 1월8일.
경찰검문을 피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신림동 박군의 하숙집앞에 내려 친구와의 연락을 부탁한 뒤 돌아서는 종운씨에게 박군은 『추워보인다』며 자신의 미색털목도리를 건네준 것이 마지막이었다.
종운씨는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라 30만원 수입의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지만 박군기념사업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다.
박군의 국가배상금문제가 신속히 해결되면 「박종철 기념인권회관」을 건립,소외된 계층을 위한 인권상담사업을 벌여나가며 박군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고 서울대 구내에 기념비를 설립한다는 게 올해 사업목표다.
종운씨는 『박군의 민주화에 대한 굳은 뜻을 기념사업을 통해 평생 실천해나갈 것』이라며 『이 길만이 박군의 부모님이자 나의 부모님에 대한 마음속의 빚을 갚아나가는 길』이라고 밝혔다.<최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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