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고부가 함께 엮는 화목의 실타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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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눈 내리는 밤, 깜박거리는 불빛 아래서 한코씩 떠올리며 뜨개질하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평화롭고 정겨운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살을 에는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어머니가 정성스레 떠주신 스웨터로 마냥 훈훈하기만 했던 기억을 대를 물려가며 주고받는 가정이 있다.
시어머니 조수진씨(94), 며느리 윤장순씨(54·이종찬 민자당의원 부인·서울 신교동 6의 22)로 이어지는 뜨개질 솜씨는 고부간의 정을 한올씩 엮어가며 가정의 화목을 짜내는데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
조여사는 대원군의 외손녀이며 고종황제의 조카딸. 조씨의 친정오빠와 시아버지가 됐던 이회영 선생이 독립운동 동지라는 인연으로 이회영 선생의 아들 규학씨와 정혼, 경기여고 졸업을 한달 앞두고 결혼식을 치렀다. 조여사는 졸업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시댁을 따라 나섰다.
만주에서 배경을 거쳐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던 상해에 정착하게 된 조씨는 남편이 독립군 양성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느라 전 재산을 바치는 바람에 끼니 굶기를 밥먹듯 할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여름에는 겨울이불을 저당 잡히고, 겨울에는 여름 옷가지를 저당잡혀 근근이 살아가던 그가 생계부양책으로 손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삯뜨개질. 당시 홍콩을 훨씬 앞지르는 도시였던 상해는 뜨개질이 크게 유행했다. 편물기계가 없던 시절이라 손뜨개로 스웨터·코트·양말·목도리 등을 짜주고 적지않은 돈이나 먹을 것을 품삯으로 받곤 했다.
당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상해식 스웨터는 목선을 둥글게 파고, 허리는 고무뜨기로 잘록하게 뜨고 밑은 넓게 퍼져 엉덩이 중간 부분까지 내려오는 오픈스웨터. 46년 가족과 함께 귀국한 후에도 슬하의 자녀들에게 상해식 스웨터를 즐겨 입혔다.
삯뜨개질을 할 정도로 빼어난 솜씨를 지녔던 시어머니의 뜨개질은 윤씨에게 대물림됐다. 중학시절에도 뜨개질을 좋아했던 윤씨는 시어머니가 들려주는 상해·북경시절의 얘기를 들으며 상해식 스웨터 뜨기를 익혔다. 점차 뜨개질에 매료된 윤씨는 국내에 도입되기 시작한 기계편물에도 손을 대 내림솜씨의 영역을 한층 넓혀갔다.
20여년 전 그가 편물기계로 짠 첫 솜씨를 기념해 시어머니께 선물한 빨간 스웨터는 이제 빛이 바래긴 했지만 지금도 겨울이면 조씨가 벗기를 거부할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윤씨의 뜨개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73∼76년 주영대사관에 근무하는 남편을따라 런던생활을 하던 때. 당시 국내에서는 좋은 바늘이 흔치 않아 대나무를 깎아 만든 바늘로 만족해야 했으나 런던에는 굵기가 다양한 강철바늘과 아름다운 털실, 정확한 본이 지천으로 널려있자 「뜨개질 속에 파묻혀」 지냈다.
신경성 위염으로 인한 불면증까지 뜨개질로 잊었던 그는 뜨개질 솜씨가 소문나면서 동료부인들이 배우기를 자청, 본의 아닌 뜨개질 강사까지 됐다.
80년 남편이 정계에 뛰어들면서 뒷바라지에 나서느라 바늘 잡기가 어려워졌지만 편물 관련 전시회만은 지금도 빼놓지 않을 정도.
조여사도 89년까지는 곧잘 목도리나 덧버선을 짰으나, 작년 말부터 노환이 심해 거동마저 불편해진 상태.
『이제 세상이 편해져 값싸고 세련된 편물제품을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됐지만 한코 한코에 깃든 정성을 생각하면 손뜨개만큼 값진 것은 없어요.』
윤씨는 시어머니가 자신의 1남2녀에게 뜨개질 옷을 입혀 키웠던 것을 회상하며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손녀의 조끼 두벌을 뜨개질 해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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