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초대총리 이현재 정신문화연구원장(일요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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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주화 실천 「소신내각」필요/세모맞아 윤리규범 확립 절실/자기주장 「간접화술」도 익혀야
서울에서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가는 길은 평일 오전인데도 퍽 혼잡했다. 차가 많기도 했지만 넓은길이 갑자기 좁아져 병목현상을 빚는가 하면 여기저기 공사를 하느라 파헤쳐져 교통의 흐름이 끊기기도 했다.
운전자들은 저마다 조바심치며 성급하게 차를 몰아댔다.
서로가 서로를 방해해 혼잡을 가중시키면서도 상대방에게만 눈을 흘기고 짜증을 내는 표정이 역력했다. 늘어나는 차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모자라는 시설,관리의 비효율·계획성 부족,미봉적 대처,저만 아는 이기주의,거기서 벌어지는 무질서·혼란….
마치 우리사회의 축도를 보는 느낌이었다.
6공 첫 총리였던 이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전 서울대 총장·61)을 올해 마지막 「일요 인터뷰」에서 만나기 위해 청계산 골짜기 연구원을 찾은 것도 이런 답답한 현실에 진단과 처방은 없을까 해서였다.
원장실에서 마주앉은 전 재상은 총장시절이나 총리시절이나 변함이 전혀 없어보이는 소탈한 학자풍­. 그러나 앉자마자 개각에 대한 반응부터 물었다. 총리재직 9개월여만에 그만큼 「정치화」가 된 탓일까.
『이번 개각에 대해 뭐라고들 얘기합니까.』
사실은 먼저 던지고 싶은 질문이어서 『어떻게 보시느냐』고 거꾸로 되묻자 빙긋이 웃기만 했다.
『바로 얼마전 정부에 있었던 사람인데 뭐라고 말을 하겠습니까』하고 끝내 대답을 피했다.
­개각에 국민들의 기대도 있습니다만 실망과 우려의 소리도 큽니다. 새 내각의 역할과 역점을 두어야 할 시책방향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제가 6공 출범과 함께 첫 총리직을 맡았을 때 저는 저희 내각이 할 일은 민주화의 길을 여는 정부가 되는 것이며 정부의 도덕성·신뢰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정부의 모든사람들이 그런 의지를 갖고 일했고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봅니다.
9개월 남짓만에 바통을 넘겼습니다만 이제 민주화의 길을 달려온지도 3년이 지났으니 만큼 민주화의 뿌리를 내리고 기반을 확실히 다질때가 아닌가 합니다. 민주를 실천하는 강력한 내각이 필요한때 같습니다.』
­사회가 퍽 혼란스럽습니다. 우리사회의 현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시는지.
『한마디로 새 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회임의 진통기라고 봅니다. 이 「턱」을 잘 넘어야만 합니다. 정치·경제·사회 모든 방면에서 앞으로 2∼3년이 고비가 아닌가 해요.』
­그런 점에서 90년대의 첫 해인 올해는 퍽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되는데 올 한해 우리사회의 변화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흔히 해가 바뀌면 「다사다난했던 한해」라고들 하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올 한해는 말 그대로 험난했다고 봅니다. 보수적인 정부의 시각으로도 「총체적 난국」이라는 진단이 나올만큼 사회 각 분야에서 혼란이 심했고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될 정도로 치안이 불안했고 정치불신·경제침체·물가앙등 등 어두운 측면이 두드러졌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구름은 은빛깔의 뒷면이 있다」는 말처럼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측면도 있었다고 봅니다. 정치적 갈등은 민주주의를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치러야 할 대가이며 경제의 어려움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조정과정이라 할 수 있고 북방외교의 결실,남북관계의 개선기미 등은 특히 밝은 측면이지요.』
­「새질서」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겠습니까.
『민주주의라고 해야겠지요. 민주주의란 퍽 폭넓은 개념인데 자율과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질서·경제질서·사회질서를 정립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치에서의 여야관계,경제에서의 노사관계 등이 다 그런 새 질서로 조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여야관계는 논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재의 「동이불화」상태에서 「화이부동」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정치적 동반자라는 유대를 바탕에 깔고 정책의 차이를 추구해야만 정치발전이 가능합니다.
노사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노조의 모토가 고능률·고이윤·고보수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노동운동도 고보수만이 아니라 고능률·고이윤을 추구해야만 우리경제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같은 사회발전에 가장 큰 장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우리사회는 신뢰의 반경이 퍽 좁은 사회입니다. 가정의 범위를 넘지 못해요. 가족끼리는 믿고 가족을 위해서는 헌신할 생각을 가지면서도 가정을 벗어나면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남남이 됩니다. 서로 불신하고 자기이익만 추구합니다. 이 극도로 핵화된 신뢰의 범위를 의식적인 노력으로 확장해야만 합니다. 내 이웃·동네·직장·지역사회·국가로까지 범위가 넓어질때 그것이 바로 발전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우리사회의 도덕적 타락현상을 걱정하는 소리가 높습니다만.
『일부 종교단체에서 「내탓이오」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운동이 일시적 캠페인이 아니고 일상에서의 실천으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와 함께 현대의 산업사회에 맞는 합리적 사고에 기초한 윤리의식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예부터 서울사람이나 개성사람을 「깍쟁이」라고 불렀습니다만 이제는 그런 「거저 안주고 거저 안받는다」는 「경우와 사리에 맞는」 합리적인 윤리규범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서 저는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에게 개인적으로 등록금을 대주는 온정보다는 그 돈을 학교에 장학금으로 내라고 권유하곤 합니다. 특히 강조할 것은 지도층의 솔선수범입니다.』
­내년 시행될 지방자치제에 기대와 함께 우려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반드시 가야할 길 아닙니까. 경험도 부족하고 여건도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극복해 나가야지요. 그러나 국가발전의 갈길이 먼 우리로서는 지자제가 단순한 정치참여의 확대에 그쳐서는 안되고 지역의 총체적 발전에 기여하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지역경제·문화발전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와 함께 정계를 비롯한 각 분야의 세대교체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요.
『앞으로 2∼3년안에 자연히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바란다면 좀더 헌신적이고 애국적인 지도자들이 각계에서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일부에선 남미화의 우려를 나타내고도 있는데 우리사회의 발전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국민의 교육수준이나 기강,윤리의식에 비춰 남미화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턱을 넘기 위해 우리국민과 정부 모두가 합심해야만 합니다. 최근 어느 외국 언론이 우리를 「직접 민주주의적인 국민」이라고 평한 것을 보았습니다만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직선적인 자기주장보다 간접적인 자기표현 기술도 익혀야 하리라 봅니다.』
88년 2월 총리로 취임,12월5일 사임한뒤 89년 5월 제7대 정신문화연구원장으로 취임해 1년6개월째다. 오전 8시30분 출근,오후 5시 퇴근하는 규칙적인 생활에 전공인 경제학서적을 주로 읽는다고 했다. 연말계획을 묻자 『촌사람이 무슨… 』하고 웃는다.<문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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