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현실 한 올과 비현실 한 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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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호 31면

‘가을에’ 시리즈 중, 1992년 ⓒ 이갑철

‘가을에’ 시리즈 중, 1992년 ⓒ 이갑철

서른 즈음에, 그는 봄이 싫었다. 사방에서 꿈틀거리고 재재거리고 터질 듯한 봄이 시끄러워서 싫었다. 반면, 가을이 좋았다. 그림자마저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 같은 그 계절의 핍진함과 서늘한 기운이 좋았다.

이갑철의 사진 시리즈 ‘가을에’는 그렇게 한창, 가을이면 가을을 탐하느라 카메라 하나 둘러메고 우리 땅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서른 즈음에 찍은 사진들이다. 그때가 1992년이다.

30여 년이 지났지만, ‘가을에’ 시리즈에서는 제목 그대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가을에 풍경이 가득 담겨있다. 산골 마을 사람들, 분교의 가을운동회, 벌개미취 피어 있는 들길, 저문 강의 풍경…. 하지만 사진가가 누구인가. 원로사진가 강운구가 “스트레이트로 찍어서 이갑철처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귀신의 기운을 전해 준 다른 예를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한 ‘충돌과 반동’의 작가다. ‘가을에’는 모두 어느 한 시절의 일반적인 풍경을 스트레이트로 찍은 사진이지만, 분분한 해석을 낳는 불가해한 정서를 담고 있다.

이 사진을 보자. 첩첩한 산 능선이 원경으로 펼쳐져 있고, 지금은 보기 어려운 미루나무들이 수직으로 뻗어있다. 신작로 길은 길게 휘어져 흐른다. 그 사이를 단발머리 두 소녀가 걷고 있다. 여기까지는, 사진이 보여주는 실제다. 그러나 이 현실은 조금만 각도를 달리하면 비현실적인 장면으로 뒤바뀐다. 흑백사진 속에서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두 소녀의 옷은 흑과 백의 대비를 이룬다. 마치 현실계와 명계가 나란히 어깨를 견 듯하다. 잎을 모두 떨군 나무들은 뿌리를 하늘로 향한 채 거꾸로 박힌 듯 기이하고, 느낌이 거기에 이르면 산의 농담도 수상해진다. 평범한 현실 안에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느낌들을 재빠르게 포착해 ‘현실 한 올과 비현실 한 올이 교직되는 현실’을 만들어 내는 이갑철 사진의 비범함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이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있다. 언젠가 작가로부터 이 땅의 사계를 모두 하나씩 시리즈로 작업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봄은’ ‘여름을’ ‘겨울로’, 제목도 정하였던가. 이갑철의 ‘여름을’ 기다려본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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