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김기남은 왜 ‘신을 만든 사람’이라 불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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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김기남 북한 전 노동당 비서의 장례식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국장으로 진행됐다. 조선중앙통신

지난 9일 김기남 북한 전 노동당 비서의 장례식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국장으로 진행됐다. 조선중앙통신

김기남 전 북한 조선노동당 선전 담당 비서가 지난 5월 7일 사망했다. 

향년 94세.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의 정당화와 우상화를 만든 장본인이다. 노동신문은 지난 5월 8일 그의 부고를 전하면서 “당의 영도계승 시기 당 선전선동 부문의 중책을 역임하면서 투철한 수령관과 당적 원칙성, 높은 정치 이론적 자질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그래서인지 중국은 그를 ‘造神的老人’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신을 만든 사람’이라는 뜻이다.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은 신 같은 존재다.

김기남은 2010년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중할 때 81세의 노구를 이끌고 그를 따라갔다. 김정일은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 5번째 방중이고, 김기남이 그를 동행한 것은 처음이다. 김정일의 중국 방문은 주로 군사‧경제 분야를 다루기 때문에 선전 담당 비서가 동행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때도 김정일이 2개월 전 발생한 천안함 폭침 사건을 중국에 설명하기 위해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현철해‧이명수 국방위원회 국장 등 군부 실세들로 방문단을 꾸렸다.

이런 성격의 대표단에 김정일은 김기남을 포함했다. 왜일까? 이유는 김정일이 2009년 1월 김정은을 후계자로 확정한 이후 중국에 후계 구도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김정일은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후계 작업을 서둘렀고 후계자에 대한 중국의 지지와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는 중국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역할을 김기남에게 맡긴 것이다. 김기남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정일의 기대에 부응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방중 이후 그해 9월 조선노동당 제3차 당 대표자회에서 공식적으로 후계자가 됐다.

김정은이 제3차 당 대표자회를 통해 맡은 자리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조선인민군 대장이었다. 부위원장은 원래 없던 직책이었는데 신설했다. 후계자에 걸맞은 자리였다. 이때부터 국방성, 국가보위성, 사회안전성 등 정권 안보에 핵심 역할을 하는 기관의 수장들은 김정은에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김정일과 권력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 12월까지 딱 1년 3개월 동안이다.

김기남은 2011년 5월 김정일을 따라 중국을 또 방문했다. 김정일의 7번째 중국 방문이자 마지막이었다. 3개월 뒤 잠시 중국을 들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김정일이 러시아 울란우데에서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방북길에 잠시 중국을 지나갔다. 북·중 정상회담 없이 후춘화 네이멍구 당서기와 만나는 정도였다.

김정일의 마지막 방중에 김기남은 자신의 나이를 생각할 수 없었다. 김정일의 건강 상태를 생각하면 무조건 따라가야 했다. 김정일의 마지막 중국 방문은 ‘자식 걱정’이었다. 황금평에 대한 중국의 과감한 투자 요청 등도 있었지만, 아들 김정은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지지를 한 번 더 확인받고 싶었다. 그래서 김정일은 김기남을 또 데리고 갔던 것이다.

겅뱌오(耿飚) 전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장. 바이두(百度)

겅뱌오(耿飚) 전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장. 바이두(百度)

김기남은 중국과 과거에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첫 인연은 1977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겅뱌오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의 초청으로 조선노동당 친선대표단이 베이징을 방문할 때 동행한 것이다. 당시 김기남은 노동당의 기관지 노동신문의 책임주필을 맡고 있었다. 겅뱌오는 대외연락부장 이후 1979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으로 옮기는데, 거기서 현재 국가주석인 시진핑을 비서로 두었다.

겅뱌오는 조선노동당 친선대표단과의 환영 만찬에서 “우리는 중‧조 양당, 양국의 전투적 단결과 혁명적 친선을 아주 진귀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화궈펑 주석과 김일성 주석의 친절한 관심 아래 중‧조 양당, 양국 인민의 혁명적 친선과 전투적 단결이 필연코 발전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덧붙였다. 그때는 ‘전투적 단결’을 입에 달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김기남은 1978년 9월과 1984년 3월 베이징을 다시 찾았다. 모두 노동신문 대표단장 자격으로 방문했다. 특히 1984년 3월은 후야오방 총서기를 만나기도 했다. 언론사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만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그것도 후야오방이 평양을 방문하기 2달 전이었다. 후야오방은 1984년 5월 4일~11일 양상쿤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과 함께 방북했다. 그의 두 번째 방북이었다.

후야오방은 “김일성 주석이 남북 조선과 미국이 합친 3자회담을 제시했는데, 우리는 완전히 지지한다”고 밝혔다. 김일성은 1984년 1월 한국과 미국에 남북미 3자 회담을 제의했다. 김일성은 “남북미 3자 회담에서 정전협정을 대신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문제, 남북한 불가침선언을 채택하는 문제를 토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후야오방은 김기남에게 중국이 남북미 3자회담을 지지한다고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후야오방은 “만약 그 어떤 국가가 조선 북측을 침범한다면 우리는 일찍이 말한 바와 같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모든 힘을 다해 당신들을 지지할 것이며 침략자들을 격파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후야오방은 방북에 앞서 김일성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얘기를 김기남에게 먼저 건넨 것이다.

이런 중국과의 인연으로 김기남은 김정은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크게 이바지했을 것이다. 후계자가 되는 과정 등 김기남의 많은 역할에 고마웠는지 김정은은 영결식에 참석해 고인의 유해에 흙을 얹기도 했다. 중국 사람이 말한 ‘造神的老人’(신을 만든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 북한 또 그런 사람이 나올까?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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