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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계를 정확히 알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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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분의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사마의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나는 나의 경우를 생각해 봤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나는 2년간 학원비도 내지 않고 피아노학원에 다녔다. 그 학원 원장님이 술을 좋아했는데, 학원비 대신 엄마네 식당에서 공짜로 술을 마시기로 하고 내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학원은 문을 닫았고 나는 꿈을 접어야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화가가 되는 꿈을 꾸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만난 미술 선생님의 칭찬 때문이었다. 그 선생님은 내게 늘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 미술부를 만들고 스케치북이며 목탄을 사주셨다. 부원이라고는 오직 나 하나뿐인 미술부에서 나는 화가가 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진학할 무렵이 되자 나는 꿈을 접어야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로는 단 한번도 미술 레슨을 받은 적이 없었으며, 미술학원에 다녀본 적이 없는 내가 미대 시험을 본다는 것은 턱없이 무모하게만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는 생각했다. 우리 집은 가난하다. 내 꿈을 위해 돈을 투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도 돈이 없다. 꿈은 꿀 수 있지만 돈 드는 꿈은 안 된다. 그럼 돈 없이도 내가 이룰 수 있는 꿈은 뭘까? 내가 내 나이 열아홉에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 작가가 되려면 열심히 읽고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히 쓰면 되는 것이 아닌가. 책이야 도서관에 가면 공짜로 얼마든지 볼 수 있고, 생각이야 아무 데서나 돈 없이도 할 수 있고, 쓰는 것이야 연필하고 공책만 있으면 되니까.

어떤 이는 내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쉽게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니냐고. 그러나 나는 나의 선택을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것에 매달리다 울분에 사로잡혀 괴물이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부모들은 자식에게 말한다. 너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해주지 못한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무엇이든 잘하기만을 바라며 이것저것, 많은 것을 가르치기는 한다. 그러나 내 아이가 무엇을 못하는지, 내 아이의 한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내 아이가 못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때, 그 한계를 부모가 인정하고 수용할 때, "이건 아니구나. 그럼 다른 게 뭐가 있을까" 하고, 내 아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무리하게 대출받아 집을 사고 땅을 샀다가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해 파산하거나 어렵게 강남에 입성했다가 생활비를 유지하지 못해 급하게 집을 처분해 손해 봤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많은 이가 자신의 한계를 수용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렇게 거품이 잔뜩 낀 사회가 되고 만 것은 아닌지.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알 때, "나는 이건 안 되는구나. 그럼 이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것은 무엇인가" 하고, 그때부터 비로소 나만이 할 수 있고, 나만이 이룰 수 있는 소망 하나를 갖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명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