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끝이라는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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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끝이라는 말'- 한명희(1965~ )

더 이상은 넘겨볼 페이지가 없다는 것

아무리 동전을 쑤셔 넣어도

커피가 쏟아지지 않는다는 것

나도 모르게 세 가지 소원을

다 말해버리고 말았다는 것

그래, 그래서

등불도 없이 밤길을 나서야 한다는 것

끝이라는 것

막배가 떠나버린 선착장에서

오래도록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서 있는다는 것

오래도록 시간표를 떠나지 못한다는 것


겨울이 성큼. 한 해가 끝나가고 있단다. 자막이 오르듯 낙엽이 내린다. 한 살을 더 먹고 한 해를 줄였다. 끝나고 나면 산 것도 살지 못한 것도 다 허공일 것이다. 막배를 타고 가다 보면 남기고 온 여럿, 뒤에서 몰려온다. 빼 접어놓은 시(이렇게도 많았다니!)만도 아직 머리맡에 수두룩이 쌓여 있다.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서 있는다는 것!

<장석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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