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대부」 손씻고 새 삶 명동털보 김창오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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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반복되는 보복에 대한 회의와 선량한 시민들에 대한 죄의식이 저를 새로 태어나게 한 셈이죠』
60년대 「명동털보」로 불리며 주먹 천하통일을 이뤘던 김창오씨(50).
제주시 해안동1 일대 3만평의 목야지를 회개의 삽질로 일군 김씨의 모습은 그렇게 평화롭고 다정해 보일 수 없다.
66년 조직원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명동을 장악했던 김씨가 홀연히 자취를 감춘 것은 소공동파와의 일전 때문이었다.
제주시 J고 1년생이던 16세 때 무작정 가출, 1백70㎝키에 80㎏인 통짜 몸 하나만 믿고 조직폭력 계에 발을 디딘 김씨는 의리와 뚝심으로 10년만에 명동식구 가운데서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정상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는 한판 승부와 보복을 계속해야 했던 김씨는 66년 드디어 폭력계에서 종말이라 일컫는 생선회칼 집중공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60년대 주름잡아>
명동탈환을 노리는 소공동파가 기습공격, 집단 난투극을 벌이다 생선회칼로 아랫배를 수 차례 난자 당했다.
『며칠만에 눈을 뜨고 나니 비로소 내가 병상에 누워있고 보복을 결심하기보다 왜 이런 꼴을 당해야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주먹세계에선 이 일대 격전(?)으로 김씨가 숨진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었다.
『이왕 내가 죽은 것으로 소문난 이상 폭력대부 「명동털보」는 아예 묻어버리기로 하고 농군 김창오로 다시 태어나기로 결심했었죠』
그 길로 김씨는 누구도 모르게 제주고향으로 돌아왔다.
김씨가 귀향한 당시 제주도는 중산간 지대를 개발, 축산업 장려시책을 적극 추진 중이었으나 고향에 돌아온 김씨에겐 소를 기를만한 자본이 있을 턱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김씨는 5년 거치 30년 상환조건으로 축산진흥융자금 60만원을 받고, 해안동 축산단지에 입주했다.

<동료들 유혹 이겨>
『죽을 고비까지 넘긴 내가 못할 것이 무어냐 싶어 무작정 달려들었지만 소를 키운다는 것이 쉽지 않더구먼요』
철들고 배운 것이라곤 도시의 폭력세계밖에 없던 김씨는 목초관리·사료관리는 물론 젖소의 각종 질병대책과 착유에 이르기까지 낯선 모든 것들을 배우고 익히느라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게다가 도시의 화려한 밤 세계에 익숙해진 김씨에게 중산간 지역 황무지의 고독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뒤늦게 행방을 수소문하고 명동「컴백」을 종용하는 후배·동료들의 유혹과 협박에 흔들리기를 몇십 번.
『땅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버텼습니다. 그것만이 제가 지은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은 신앙이었다고 나 할까요』

<소 파동으로 시련>
목초를 베고 젖을 짜며 피땀을 아끼지 않은 결과 10마리의 젖소가 30마리로 늘어나면서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이 같은 기쁨도 잠시, 김씨의 「새 삶은 소값 파동으로 또다시 좌절을 맛봐야 했다.
해안동 축산단지에 입주했던 20가구 중 15가구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떠나버렸다. 그렇지만 한번 결심을 다진 김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번에는 키위재배에 나섰다.
『소 키우던 목야지를 개간했지요. 삽질하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순간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우직한 성품대로 흙과 씨름해온 김씨는 지난해 키위재배로 연간 1천5백여 만원의 수입을 올렸고 올해는 수입 대체 작목으로 전망이 좋다는 유자묘목 7천여 평을 새로 일궜다.
78년 축산단지에서 만난 홍봉림씨(52)와 늦장가를 올린 김씨는 이제 외아들(13·제주서중1)과 함께 부농의 꿈을 한껏 키우고 있다.
『우리 아들도 벌써 옛날 방황하던 아빠만큼 자랐어요. 내 자식이 폭력이나 불량환경에 노출되다시피 한 요즘의 세태를 보면 빨리 이 사회도 다시 태어나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답답해져 옵니다』

<요즘세태가 답답>
옛날 조직폭력배들은 그나마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해 인신매매 등 만인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은 삼갔다는 김씨는 요즘 곧 후회할 일을 거듭하는 후배들을 보면 오늘이라도 새 삶을 찾아 나서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고 바랄 뿐이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주먹으로 얻어지는 것은 후회뿐이며 젊은 시절 찬란해 보였던 유흥가의 그 유혹도 정말 한줌 구름에 불과했다』는 김씨.
나이 탓인지 힘이 달려 제2횡단도로에서 농장에 이르는 2·5㎞가 트럭이라도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며 너털웃음을 짓는 김씨에게서 진솔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배어있는 평화가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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