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칼럼

대화에서 협상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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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어느 날 내린 밤비로 가을이 가듯이 한 시대를 매듭짓는 사건이 있다. 미.소의 냉전시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사건으로 끝났다. 그 이후를 탈냉전, 미국의 일방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 후 20년이 안 되어 이 시대도 이제는 막을 내리고 있다. 이라크 전쟁 때문이다. 미국의 일방주의는 가고 미.중의 양대 세력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남북관계도 시대의 매듭이 있다. DJ의 방북으로 대화의 시대, 햇볕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으로 이 시대는 매듭이 지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핵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햇볕은 실패했다. 이제는 남북관계의 새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의 남북대화는 끝내야 한다고 믿는다.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국민이 불안해 하지 않는 것은 햇볕 덕분이 아니라 햇볕으로 인해 우리가 병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남북대화는 병든 대화였다. 대화는 자기 것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돼야 한다. "나는 내 것이 좋은데 너는 그렇지 않다 하니 왜 그런지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눠보자"는 것이 대화다. 이를 통해 양쪽이 같은 목표에 다다를 수 있을 때 대화는 성공하는 것이다. 남북간의 대화도 우리 것에 대한 사랑과 애착이 전제돼야 한다. 자유와 인권,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라는 가치 수호가 대화의 전제가 돼야 했다. 지금까지의 대화는 그렇지 않았다. DJ가 김정일과 낮은 연방제 성명을 내면서 통일 한국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나라인지 밝히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의 입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대신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만 풍성했다. 내재적 접근이 바로 그런 것이다. 태극기를 들고 나가면 북한이 싫어한다며 한반도기를 들었다. 북한의 독재는 불가피한 것이고, 인권탄압도 이해해 줘야 한다고 했다. 반면 우리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의식만 팽배하게 만들었다. 남쪽은 일본에 아부했던 세력이 정권을 잡았고 북한은 독립운동세력이 잡았다는 말을 한다. 그동안의 과거청산이란 무엇이었나. 우리의 과거는 잘못된 것이라고 스스로를 비하하게 만든 것이다. 내 것에 대한 사랑은 없고 북한에 대한 이해심만 풍부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북한을 닮자는 얘기일까. 그러니 나라가 혼란해졌다.

자기 것에 대한 사랑이 없으니 대화에 목표가 없다. 왜 대화를 해야 하는지 방향이 없었다. 대화를 위한 대화에 몰두했다. 대화가 끊어지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행동했다. 대화의 주도권은 자연히 북한에 넘어갔다. 대화를 잇기 위해 돈 주고, 쌀 주고, 비료를 주었다. 미사일을 발사해도 대화가 끊어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북한보다 미국을 비난하는 데 앞장섰다. 핵실험까지 했는데도 전쟁을 피하자면 대화를 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왜 이런 대화를 계속해야 하나.

그렇다고 이제부터 북한과 완전히 담을 쌓을 수도 없다. 우리의 운명이다. 지금까지의 대화는 민족을 앞세워 우리 국민에게 무조건의 이해와 양보만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 남북 간에 대화가 아니라 협상을 해야 한다. 협상이란 무엇인가. 나라를 앞세운 만남이다. 우리의 국가이익은 무엇이고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만나는 것이다. 상호성이 존중되는 만남이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 정체성이 있는 만남이다. 무력위협에 굴복하여 만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뒷받침되는 만남이다. 자존감의 원칙이 지켜지는 만남이다. 이런 만남이 협상이다.

대화의 시대에는 대화만이 목표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를 위해 구조적으로 북한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협상은 서로의 이해가 맞아 떨어질 때 하는 것이다. 대화를 구걸할 필요가 없다. 필요에 따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협상의 시대를 위해 대화 위주로 운영되는 통일부도 개편돼야 한다. 운하도 중요하고 부동산도 중요하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나라의 존립과 연결돼 있다. 남북관계의 새 패러다임에 대한 대통령 후보들의 열띤 토론을 희망한다.

문창극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