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대국민 사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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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방송기자) "이회창 대통령은 오늘 검찰 수사 결과 지난 대선 때 대기업들로부터 수백억원의 돈을 받아 선거자금 등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 구속된 한나라당 출신 A, B, C씨 문제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했습니다. 李대통령은 여야 정치권과 재계에 대한 검찰의 성역 없는 수사를 주문하고, 필요하면 자신도 검찰의 조사에 응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는 이번 수사를 계기로 돈 안 드는 정치환경을 조성하고 정경유착의 검은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정치.선거제도의 혁명적 개혁을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李대통령 육성)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비통한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께 깊은 사죄의 말씀을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이 불법자금을 받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잘못된 일입니다. 법과 원칙에 평생을 바쳐온 저로서는 자책감에 참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든 허물,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위선적인 행동이었다고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무릎꿇고 사죄드립니다."

대선 패배자를 승자로 바꿔 놓은 저널적 상상력이지만 이 속에 일면적 진실이 없을 수 없다. 李전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패배해 정계를 떠났다 해도 한나라당이 SK한테 1백억원을 받은 사실은 없어지지 않는다. 제왕적 대통령인 양김 시대가 마감했으므로, 이회창 대통령은 청와대 민정수석이나 법무부 장관을 통해 검찰의 SK비자금 수사를 뭉갤 수 없었을 것이다. 李대통령 아래서도 검찰은 오늘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무제한적인 대선자금 수사를 했을 것이다.

盧대통령이든, 李대통령이든 권력은 시대의 자식이다. 시대가 대통령을 만든다. 어떤 권력도 시대를 거스를 수 없다. 이 시대의 정신은 아무래도 '정치에서 검은 돈 구조를 끊어내는 일'인 듯하다. 시대 위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후보는 똑같은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닐까. 위에서 가상의 '李대통령 육성'으로 소개된 대목은 현실 속의 이회창 전 후보가 지난주에 했던 대국민 사과 중에서 따온 것이다. 가상권력의 승리자나 현실의 패배자나 똑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시대정신의 엄중함이 서늘하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