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 마당의 사과 행상(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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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사과가 쌉니다. 맛좋고 먹기좋은 예천 사과요!』
3일 정오 서울 서초경찰서 앞마당.
트럭에 사과 궤짝을 잔뜩 실은 20대 청년이 경찰관들을 상대로 큰소리를 외쳐대며 사과를 팔고 있었다.
검정 작업복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채 불편한 다리를 조금 절룩거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나 얼굴 표정에는 자신이 넘쳐 흐를만큼 당당했다.
경북 예천군 보문면 기곡동에서 과수원을 한다는 반병성씨(24) 였다.
점심식사길의 경찰관들이 하나 둘 모여드는가 싶더니 총 38개의 사과 궤짝중 33개가 순식간에 팔렸다. 값은 궤짝당 1만∼2만1천원으로 이날 판매총액은 꼭 50만원.
『오늘은 운이 좋은 날입니다. 운반·비료·소독 등 모든 비용을 빼더라도 10만원 이상 남은것 같습니다.』
심씨는 기분이 좋은듯 싱글벙글했고 저마다 사과 궤짝을 들고 가는 경찰관들도 밝은 표정들이었다.
경찰서에서 사과를 팔게된 것은 사과 트럭을 몰고다니는 심씨를 보다못한 친구가 이 경찰서 대공2계에 근무하던 친척 김순문경장(52)을 소개해줘 김경장의 주선으로 이뤄진 것.
4년전 고교를 졸업한 심씨는 철도 공무원이던 아버지(56)가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해 명예퇴직하는 바람에 장애자로서는 힘든 과수원일을 도맡아야 했다.
특히 올 가을에는 중간상인의 폭리가 심한데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등으로 불우한 마음이 앞서 소비자들을 직접 찾아 나서고 있었다.
『두살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한데도 구김살 없이 살아가는 병성군이 대견스럽더군요. 강남지역 아파트에서 번번이 경비원들에게 쫓겨나는 것을 보다못해 경찰서 마당을 생각해냈지요.』
김경장은 심씨의 사과가 동료 직원들로부터 값이 헐하고 맛도 좋다며 인기를 끌자 흡족한 표정이었다.<정선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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