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꾼주미경의자일끝세상] 삶의 흔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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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에 세월이 더해지면 무엇인가는 오래된 것으로 남고 또 무언가는 낡은 것이 돼 버려진다. 개발과 성장의 숨가쁜 시대를 살아온 우리에게 오래된 것이란 과연 존재할까? 오래 될수록 가치가 더해가는 것을 찾기 힘든 일상에서 예외의 것이 있으니 바로 등산 장비다.

등반자들이 장비에 대해 갖는 애착이야 너나가 없지만 그 취향과 습관은 천차만별이다. 최신 장비는 하루라도 빨리 구입해 써봐야 하는 얼리 어댑터가 있는가 하면, 쇠가 삭을 정도로 오래된 장비를 훈장처럼 여기는 소신파도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발빠르게 최신장비를 갖출 정도로 부지런하지도 못하거니와 쇠가 삭을 만큼의 오랜 경력도 가지지 못한 얼뜨기라 할까? 다만 그런대로 방침이 있다면 '거듭 숙고하여, 꼭 필요한 장비를, 웬만하면 좋은 것으로 사서-좋은 것은 비싸다-, 본전 뽑고도 남을 만큼 열심히 오래도록 써준다'는 정도다. 이렇다 보니 등반에 입문할 때 마련한 장비 대부분을 아직 한번도 바꾸지 않고 여전히 쓰고 있다. 그 중 유독 마음이 머무는 장비가 8자 하강기다.

8자 하강기는 글자 그대로 8자 모양으로 생긴 쇠붙이 장비다. 하강할 때와 다른 등반자의 '확보'를 볼 때 쓰는 이 장비는 자일이 빠져나가는 속도를 조절하고 제동을 시켜주는 여러 장비 중 가장 간단하고 원시적인(?) 부류에 속할 것이다. 자일을 자동으로 사정없이 눌러 제동시킨다거나, 한 방향으로 날을 세운 톱니에 자일이 걸리도록 만들어 제동을 시키거나 하는 류의 어떤 기계적 장치도 없는 이 녀석은, 한번 감아주면 덜 빠지고 두번 감아주면 더욱 덜 빠지는 가장 단순하고도 명백한 진리를 가장 효율적으로 구현한 공학적 디자인의 결정체다.

이 간단한 장비의 안정감은 '결코 변치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온다. 말하자면 다른 장비들을 들여다 볼 때 가끔 떠오르는 '여기가 터지지 않을까' '이 부분이 부러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동으로 뭔가 하도록 만드는 데 주로 쓰이는 스프링은커녕, 쪽과 쪽을 잇는 나사 한 개도 들어가지 않은 완벽한 폐곡선의 자기 몸체 하나가 전부이니 말이다.

그 8자 하강기에 골이 패이기 시작했다. 하강할 때 자일이 지나가는 길이다. 섬유로 된 자일이 1000회를 넘게 지나가며 단단한 쇠를 훑은 탓이다. 이것이 바로 세월 아닐까. 바위는 세월을 안고 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과 변함없이 쏟아지는 햇빛과 지나가는 바람이 새겨놓은 바위의 흔적들이다. 바위에 서면 '오래된다는 것'에 대해 사색하게 된다. 흐뭇하다. 세월을 안은 오래된 물건을 이렇게 지니게 됐으니 더 나이 들어 바위를 못 타게 돼도 그리 쓸쓸하지는 않을 듯 하다.

주미경 등반 칼럼니스트 indymk@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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