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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와 항공협정 서둘 필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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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올해 시작된 한국.유럽연합(EU) 항공회담이 EU 측의 역내조항(EU Community Clause)이라는 불평등 조항 수용 요구로 계속 결렬되고 있다.

일반적 항공협정에서 양국을 운항하는 항공사의 지정 요건은 협정을 체결한 국가 또는 국가의 국민이 소유하는 항공사로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EU 역내 조항은 그것이 EU 공동체 설립의 근거가 되는 로마조약의 정신(국적에 따른 차별금지)에 위배되기 때문에 양국을 운항하는 항공사의 지정 요건을 EU 회원국 전체 항공사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EU의 시도는 다른 국가들의 많은 반발과 저항에 직면해 있다. 현재 일부 국가만이 EU 요구를 수용한 상태다. 러시아.중국.일본 등 대다수 국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도 EU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는 것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현행 우리나라 항공법에 위배된다. 항공법 제150조는 항공협정 체결 시 상대국에서 우리나라로 취항할 수 있는 항공사의 지정 요건을 상대국 또는 상대국 국민이 소유한 항공사로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EU 요구를 수용하면 이 조항을 위반하는 것이다.

다음은 EU 역내 다른 회원국의 무임승차와 이에 따른 항공운송 시장 질서의 혼란이다. 예를 들어 현재 한.영 항공협정에는 영국과 우리나라 항공사만이 양국을 주11회 운항할 수 있다.

그러나 EU 역내 조항을 받아들이면 다른 EU 회원국인 네덜란드.핀란드 등 항공사도 동등한 자격으로 한국~영국을 운항할 수 있게 되므로 EU 측에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평등한 조약이 된다. 만약 EU 회원국의 저가 항공사가 이미 협정을 체결한 다른 회원국의 항공사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며 한국~유럽 노선에 무임승차해 진입할 경우 항공사 간 제살 깎아먹기 가격 경쟁으로 우리 국적 항공사의 피해는 불 보듯 뻔하게 된다.

국적에 따른 차별 조항 철폐를 통해 공정 경쟁 환경을 조성한다는 EU의 기본 의도가 자칫 건전한 시장질서 확립과 항공운송산업의 상호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일단 EU 회원국과 항공회담 일정을 전반적으로 재조정, 급하지 않은 EU 국가와의 회담은 시기를 과감히 늦추고 우리 항공산업에 일방적 피해를 유발하는 조항은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우리 정부는 EU.미국 간 진행되고 있는 항공회담 진행 과정을 면밀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EU.미국 간 협상 방식대로 EU를 대표하는 단일 협상주체와 운항할 수 있는 권리(운수권)를 포함한 포괄적인 항공자유화 협상의 틀 안에서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그래서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불리하거나 유리하지 않은 공정한 방안을 시급히 찾아야 할 것이다.

김칠영 한국항공대학교 교수 한국항공운항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