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 한일 관계의 본질(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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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는 26일부터 서울에서 개최된 한일각료회담을 앞으로 전개될 세계질서의 재편과 이 과정에서 넓게는 아시아가 그리고 좁게는 한국·일본 등 아시아의 주요국가들이 맡아야 할 역할이 어떠해야 하느냐를 가늠할 중요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한일 양국은 여러 각도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일본은 우리 민족에 많은 고통과 피해를 준 소화시대를 뒤로 하고 평성시대를 맞고 있다. 한국도 오랜 군사정권시대를 청산하고 민주화 개혁시대를 헤쳐 나가고 있다.
이와 같은 양국 내부의 변화는 오랫동안 한일 관계에 무겁게 드리워져온 과거를 청산하고 외압이 더욱 거세질 것이 확실한 앞날을 향해 인방으로서의 호혜적 관계를 확립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비록 과거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아직도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앞날의 절박한 필요성 때문에 두 나라 당국자와 국민들은 새로운 발상과 의지로 양국간에 걸린 여러 현안들에 과거와는 다른 선린정신으로 접근해나가야 된다고 믿는다.
한일 관계의 본질문제는 남북한 관계에 있어서 일본이 맡을 역할에 직결되어 있다. 우리는 냉전시대의 유산으로서 아직도 분단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 서로가 탐색전을 벌이고 있는 한반도 상황을 일본이 뒤흔들려 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점을 또 한 번 강조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일본이 지금 시도하고 있는 대남·북한정책이 추호라도 한반도의 통일을 저해하거나 교란시키는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본은 명심해야 될 것이다.
우리는 일·북한간의 수교가 원칙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에 부수되는 제반조건들이 현 남북한간의 민감한 균형을 한쪽으로 기울게 해서는 안 된다.
김환 대표단이 평양과의 첫 접촉에서 약속한 대북한 배상문제와 교역조건들이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교류와 평화공존에서 찾으려는 목표를 일본이 선점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가장 경계한다.
그와 같은 접근은 결국 모처럼 나타나고 있는 북한측 대남 접근의 동기를 약화 내지 중화시킴으로써 분단·대결상황은 풀릴 기회를 놓치게 만들 것이다.
이런 큰 테두리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이번 회담에서 의제로 상정된 기술이전,무역 불균형 개선문제,재일교포들의 법적 지위문제 등은 어떤 방향으로 해결되든간에 일본의 한반도정책의 저의를 의심케 하는 의혹으로 남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이번 회담에서 남북한을 이간시켜 당장의 실익을 차리려 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통일된 한반도를 아시아지역에 형성될 지역 세력의 일원으로,동반자로 상정하는 장기적 안목의 외교자세를 분명히 보여주기를 바란다.
정부는 당장의 경제현안 타개나 과시용의 상징적 성과에 급급하지 말고 대등한 지역세력으로 한반도가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쪽으로 외교의 기본자세를 확고히 정하고 이번 각료회담에 임해주기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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