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벼의 퇴역(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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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기적의 볍씨」로 불리며 지난 70년대 우리나라 「녹색혁명」의 주역이었던 「통일벼」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정부는 소비자들의 일반미 선호도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데다 쌀 생산량의 과잉으로 정부미의 재고가 매년 늘어나자 내년도 통일벼의 정부매입 예시량을 1백50만섬으로 크게 줄이고 매입가격도 동결할 방침임을 밝혔다.
그뿐 아니라 93년 이전까지 통일벼의 생산을 완전히 중단하도록 유도할 뜻도 비췄다.
우리나라의 쌀소비량은 지난 80년 이후 계속 연간 3천7백만∼3천8백만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매년 60만명 가량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데도 전체 쌀소비량이 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식생활 패턴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국민들의 입맛 변화에 따라 일선에서 물러나게된 통일벼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주곡자립에 대한 집념의 산물이었다.
이른바 「보릿고개」란 말로 집약되듯이 지난 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만성적인 식량부족으로 허기진 배를 움켜쥐는 인구가 적지 않았다.
그 극심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농촌진흥청이 연구를 거듭한 끝에 개발,70년대 초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통일벼는 50여종이나 되어 한때는 전체 쌀생산량의 78%를 차지하기도 했다.
통일벼의 원조는 67년 이집트에서 들여온 볍씨종자로 박 대통령의 이름자를 따 「희농」이라 명명했었다.
그러나 희농은 위로 자라기만 했지,고개를 숙이지 않아 실패작으로 끝났다. 기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후 71년 필리핀의 국제 미작연구소에서 들여온 볍씨 IR667을 국내 토양과 기후여건에 맞춰 개량한 것이 통일벼며 같은 계통의 「밀양」 「이리」 「수원」 「금강」 등의 이름이 붙은 통일계 벼가 본격적으로 농촌에 보급되었다.
이 통일계 벼는 기존품종들에 비해 병충해에 강하고 조식할 수 있으며 벼알이 굵어 단보당 수확량이 일반계보다 17.8%나 많다. 그리고 단백질의 함량이 높아 영양가가 높지만 미질이 좋지 않아 밥맛이 없다는 게 결정적인 흠이다.
어쨌든 우리의 생활문화에서 「보릿고개」를 추방하고 농정사에 일대 전기를 이룩한 통일벼의 퇴역은 일말의 아쉬움마저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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