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부동산 민심에 기름 끼얹은 금감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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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시장에서 이를 세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애당초 규제는 없었다."(금융감독원 간부)

"긴급자금을 제외하곤 이달 말까지 주택담보대출을 전면 중단한다는 공문이 16일에 왔고 17일 오후 다시 이를 취소하는 공문이 왔다. 주말 내내 고객들의 문의 전화가 폭주하는 등 혼란스러웠다."(A은행 서소문지역 대출담당 직원)

지난 주말 벌어졌던 주택담보대출 소동을 바라보는 금융당국과 일선 지점의 시각은 이처럼 다르다. 당시 상황을 보자. 금감원 김중회 부원장은 15, 16일 이틀에 걸쳐 5개 시중은행장을 개별적으로 만나 "이달 들어서도 급증하는 주택담보대출 경쟁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5개 은행은 국민.우리.신한.하나은행과 농협이었다.

이달 들어 보름 동안 주택담보대출 증가액이 지난달 증가액보다 많았던 곳이다. 김 부원장은 17일 이 같은 사실을 공식으로 밝혔다.

김 부원장은 대출 경쟁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을 뿐(?)인데 은행들의 반응은 '혼란'을 불러왔다. 상당수 은행이 대출창구 상담을 중단했고 신규 주택담보대출이 이뤄지지 않도록 전산망을 닫아버린 곳도 있었다. 모 은행 담당 임원은 "주택담보대출의 현재 잔액 수준에서 대출 총량을 유지해 달라는 금감원의 '자제 요청'이 있었다"고 말했다. '자제'의 의미가 대출을 아예 늘리지 말라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금감원의 점잖은 자제 요청 때문에 주택담보대출을 신청해 놓은 고객은 갑자기 돈줄이 막히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한 네티즌은 "보름 전 아파트 계약을 하고 잔금 대출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느닷없는 대출 중단 소식에 회사를 조퇴해 은행으로 달려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하루 만에 '대출 정상화'로 바뀐 데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다. 금감원 간부는 "묶은 적이 없으니 푼 것도 당연히 없다"며 "공식적으로 다시 지시를 내린 것은 없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은행 쪽 얘기는 다르다. 모 은행 직원은 "17일 오후 내부 통신망으로 '전날 규제는 없어졌다. 상관없이 정상 대출을 하라'는 공문이 왔다"고 말했다.

이날 금감원 간부들의 반응에서는 '은행 건전성을 걱정해 선의로 자제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는데 은행들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괜히 일이 커졌다'는 억울함과 분함이 엿보였다. 금감원의 한 간부는 "미국 등 선진국 금융당국도 긴급 상황에선 금융회사에 정책 협조를 요청하며 이를 '모럴 스웨이전(moral suasion.도덕적 설득)'이라고 한다"고 변명했다. 도덕적 설득 차원에서 주택담보대출 자제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관치금융에 익숙한 금융계 현실을 금감원이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평소 회초리만 들던 아버지가 갑자기 자상하게 타이르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금융계의 다른 관계자는 "금감원이 부동산정책과 '코드'를 맞추면서 '한 건' 하자는 데 급급해 금융시장 상황과 관계없이 대출부터 막고 보자고 나섰던 것"이라며 "금감원의 어설픈 '코드 행정'이 가뜩이나 뜨거운 '부동산 민심'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라고 꼬집었다.

최준호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