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 러시아 '중국인 경계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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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연해주(프리모르스키).하바롭스크주.아무르주 등 러시아 극동 지역이 '황색바람'에 떨고 있다. 이 지역에 중국인들이 대거 진출, 상권과 농업을 포함한 주요 산업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 밀도가 비교적 낮은 극동지역에 영구 정착하는 중국인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장기적으로 이 지역이 아예 중국으로 편입될 것이란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러시아 언론들은 중국 팽창을 경고하는 특집 기사들을 연이어 쏟아내고 있다.

◆ 거세지는 황색바람=현지 언론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블라고베센스크 등 극동 지역 주요 도시의 호텔과 식당.카지노 등을 장악해 가고 있다. 대형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중국인 사업가도 생기고 있다. 수만 명의 중국인 상인과 계절 노동자들이 양국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시장엔 값싼 중국제 생필품과 식료품이 넘쳐난다. 채소.과일.고기.달걀 등은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 버려진 콜호즈(협동농장) 농지를 지방 정부로부터 임대받아 농사를 짓는 중국인도 해마다 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국립대의 류드밀라 에로히나 교수가 "중국인들이 농업과 식료품 시장을 장악하면서 극동의 식량 안보가 위기에 처했다"는 보고서를 낼 정도로 러시아의 우려는 크다.

현재 러시아 극동지방에는 4만~5만 명의 중국인이 합법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당국은 그러나 실제론 그 몇 배의 중국인이 불법으로 살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인들은 관광 비자로 입국해 그대로 눌러앉는가 하면 가짜 거주 비자나 영주권을 입수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인과 결혼해 영구 정착하는 중국인도 늘고 있다. 극동 지역엔 중국 정부가 러시아인과 결혼한 자국인에게 특별보조금을 지급한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이 지역 진출을 장려하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이민 당국은 최근 중국인 불법 거주를 줄이기 위해 30일이던 기존 무비자 입국 기간을 15일로 줄이는 등 단속에 부심하고 있다.

◆ 높아가는 경계심=일부 러시아 전문가들은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수십 년 뒤엔 극동 지역을 중국이 차지할 것"이란 경고를 내놓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인구다. 극동 지역은 러시아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지만 인구는 겨우 700만 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소련 붕괴 이후 계속 감소세다. 반면 극동 지역과 가까운 중국의 동북 3성엔 1억 명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다.

극동에 대한 중국의 역사인식도 주민들의 러시아 이주를 부채질한다는 분석이다. 중국 교과서는 "극동 지역이 역사적으로 중국 땅이었으나 러시아에 빼앗겼다"고 가르치고 있다. 중국의 일부 정치 지도자들도 "언젠가는 극동을 홍콩이나 마카오처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외교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극동지역은 1689년 러시아와 청이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에 따라 중국 영토로 확정됐지만, 러시아가 1858년 청나라가 영국과 분쟁을 벌이던 틈을 타 아이훈 조약으로 공동 소유권을 얻었으며, 1860년 청과 영국.프랑스 간의 분쟁을 조정해준 대가로 합병했다.

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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