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CEO형 총장'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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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부회장을 지냈던 서강대 손병두(65) 총장은 지난해 7월 취임한 뒤 충격을 많이 받았다. "명함 한 장 파는데 주문 따로, 결제 따로 하다 보니 1주일이 걸립디다. 기업 같으면 당장 퇴출 감인데…." 손 총장은 결제 시스템을 바꾸는 등 대학 개혁을 했다.

1년4개월이 지난 요즘 손 총장에 대한 반응은 엇갈린다. 직원 이모씨는 "짧은 기간에 260억원이나 모금하고 대학에 개혁 마인드를 불어넣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모 교수는 "대학을 잘 모르는 총장의 압박이 심해 피곤하다"고 했다.

대학가에 CEO 총장 논란이 일고 있다. "대학도 기업처럼 운영하는 게 낫다"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기업식으로 대학을 몰아붙이면 부작용만 생긴다"는 반발도 있다. 연임을 희망하던 고려대 어윤대 총장에 대해 고려대 교수들이 반대표를 무더기로 던진 것도 대학가의 이런 갈등을 반영한다. 때마침 고려대와 성균관대.경희대.동국대가 총장 교체 과정에 있다.

◆ CEO형 총장들=한국통신 사장과 정보통신부 장관을 거쳐 지난해 11월 광운대로 자리를 옮긴 이상철 총장은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 총장은 "대학은 학생 등록금으로 운영되는데 교직원들이 학생을 먼저 생각하는 마인드가 부족하다"며 "그리고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얘기는 '총장님, 대학은 기업과 다릅니다'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건국대 오명 총장은 과기부총리를 역임하고 9월에 취임했다. 오 총장은 "총장은 학문하는 자리가 아니라 관리하는 자리"라며 "미국.유럽 대학과의 공동 연구 등 국제화를 적극 추진 중"이라고 했다.

고려대 어윤대, 연세대 정창영 총장은 경영학과 경제학을 전공해 교수 출신 CEO형 총장으로 꼽힌다. 발전기금 3500억원을 모으는 등 고려대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어 총장은 교수들의 자격심사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20일 선임되는 고려대의 차기 총장 후보들은 모두 "내가 돈을 끌어오겠다"고 장담한다.

법학과 이기수 교수는 5000억원을, 비(非)고려대 출신인 경영대 이필상 교수는 3000억원을 발전기금으로 모으겠다고 공약했다.

동국대는 16일까지 차기 총장 후보를 공모했다. 대학 측은 "내부 인사 5명과 외부 인사 1명 등 6명이 지원했다"며 "대학이 발전하려면 재정 확보가 필수이기 때문에 재단 측에서는 대외 활동이 왕성한 CEO형을 원한다"고 말했다.

◆ CEO만 성공하는 건 아니다=215일간의 직원 파업을 '무노동 무임금'으로 관철시킨 한국외대 박철 총장 등은 평생 학자 출신이다.

성균관대 서정돈 총장과 부산대 김인세 총장 등은 의사 출신이다. 이들은 CEO형 총장 못지않은 경영 마인드를 갖고 대학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외부 실적이 화려한 CEO 총장들이 대학 내부에선 갈등을 만들어 내는 경우도 흔히 있다.

영남대 김재춘(교육학) 교수는 "CEO형 총장들이 내부에서는 리더십 부재로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다"며 "외국처럼 총장을 모든 직업에 개방하고 총장은 영업사원 마인드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대학노조 한정이 정책국장은 "교수를 대상으로 개혁이 쉽지 않기 때문에 CEO형 총장들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며 "그러나 이들이 신선한 바람을 몰고온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양영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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